제주 올레 본토 완주 에필로그
18-1/2 코스인 추자도 구간을 가지 못했지만 제주도 본토 구간을 모두 완주했다. 일전에 추자도에 가려고 했지만 뱃 시간이 맞지 않아 포기했는데 추자도 가는 것이 여의치 않아 제주 올레 여행기를 이번에 마무리 해야겠다.
그러고 보니 제주도 땅에 맨 처음 발을 딛게 된 것은 1973년 중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이었다. 당시 목포에서 「아리랑」호라는 여객선을 타고 제주도 수학여행길에 올랐다.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삿갓 모양의 한라산이 보이기 시작했는데도 배는 가도 가도 도착하지 않고 큰 파도에 요동이 치자 결국에는 뱃멀미를 심하게 했다.
그 이후 1988년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신혼여행으로 제주도에 갔다. 당시에는 대절 택시로 제주의 명소를 여기저기 방문해서 택시 기사가 기념사진을 찍어주었다. 다른 것은 특별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산속 길로 어렵게 찾아간 산굼부리에서 원형의 현무암 구멍을 두고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몇 년전에 산굼부리에 갔었는데 맷돌 원형 현무암이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제주도에 가면 건물과 사람이 많지 않은 한적한 섬이었다. 사람들이 쓰는 말이 달라 이해하기가 어려웠으며 제주도 사람들은 육지 사람들을 늘 경계하는 듯했고 무뚝뚝해 보였다. 더욱이 날씨도 고르지 않은 데다 육지와 달리 논밭은 없고 온통 검은 돌만 널려있어 척박한 섬이라는 인식을 지울 수 없었다.
2011년 회사 발령으로 광주에서 근무한 이후 매년 2~3차례 방문하다 보니 제주의 명소가 하나둘 눈에 들어오면서 이제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제주에 가게 되면 무엇보다도 제주의 자연환경과 풍광이 마음에 든다. 건물과 차량이 뒤덮인 대도시와 달리 제주에서는 도심을 조그만 벗어나면 천혜의 자연인 바다와 산과 들판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제주는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지역이다. 고려 시대에 병합이 되었지만 제주도는 그 이전에 어엿한 탐라국이라는 독립국가였다. 근대에 들어 4.3이라는 슬픈 역사를 안고 있지만 제주를 사랑하는 작가와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배출시키는 문화의 고향이기도 하다. 제주 출신이 아니지만 제주에 건너와서 제주의 자연과 풍광을 담은 육지 작가들도 많이 있어 제주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제주가 마음에 들기 시작하자 차량이동이 아니라 걸으면서 제주 구석구석을 만나보고 싶었다. 결국 나는 퇴직을 앞두고 제주 올레길 탐방에 본격 나섰다.
2019년 9월에 7코스에서부터 시작된 올레길 탐방은 8차례에 걸쳐 2023년 6월 14-1코스 탐방으로 제주도 본토 27개 코스 완주를 마쳤다.
올레길에서 마주쳤던 몇 군데 장소는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아직도 눈에 선할 정도로 뇌리를 맴돌고 있다.
18코스 신촌 인근 해변에서 닭머루 정자를 바라보면서 맞주쳤던 풍경은 한순간에 나의 오감을 깨우쳐 주었다. 해안 절벽 길을 따라 들꽃이 피어있고 절벽 밑 바다에는 높지 않은 파도가 계속 밀려와 찰싹찰싹 소리를 냈다. 바다에서 해풍까지 불어와 특유의 짠 냄새까지 스며들어왔다. 한순간에 오감이 되살아나 내 몸을 일깨워주는 듯했다.
12코스 생이기정바당길 벤치에 앉아 차귀도를 바라보는 순간 주위는 고요하고 적막해지면서 일순간 편안함이 찾아 들어왔다. 그 편안함은 내가 주변의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는 일치감에서 오는 것 같았다. 내 자신이 듬직한 차귀도, 녹색 산과 푸른 바다, 들판의 야생화 등 주변 자연과 어울러 하나가 되고 싶었다. 그 순간 바다 위를 나는 새를 보자 바다에 같이 뛰어들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14-1 코스 문도지 오름 정상에서 한라산까지 펼쳐져 있는 장대한 숲을 바라보니 가슴이 탁 트이고 황홀하기까지 했다. 내 자신이 대자연 속에 파묻혀 있어 일순간 주변과 혼연일체가 된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안함에 그냥 이곳에서 계속 머물고 싶었다.
이러한 순간들이야말로 걷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이겠지 생각하고 멍하니 앉아 있으니 자리에 일어서기가 더욱 싫어졌다.
나는 퇴직 이후 어떨게 살아갈 것인가를 화두를 삼아 걷기에 나섰다. 제주 올레길을 걸으면서 화두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찾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난 제주 올레길을 걸으면서 제주도의 자연과 풍광에 그냥 빠져들어 아무 생각 없이 걷기에만 열쭝했다. 이러한 몰입을 통해 얻은 황홀경 때문에 나는 매 순간 올레길 걷기에 열중할 수 밖에 없었다.
제주 올레길에서 얻은 생각은 나이 들수록 자신의 내면에 침착하면서 자신에게 충실하자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오랜 사회 생활을 하면서 외적인 평가에 신경을 써왔던 것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퇴직 후에 어떤 일에 부딪혀라도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고 그 성취에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성취에 만족하려면 결국 내 자신이 여유롭고 느긋해야 한다는 다짐을 스스로 해봤다.
프랑스 전직 언론인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은퇴 후 6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4년에 걸쳐 1,099일간의 실크로드 도보 여행기를 3편에 나눠 책으로 썼다.저자는 오래전 실크로드의 대상들이 다녔던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장장 1만 2천 킬로미터를 걸었다.
베르나르는 은퇴 후 무료한 삶을 탈피하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실크로드 도보여행에 나섰다. 그에게서 걷는다는 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다지는 일이지만, 비바람과 느낌이 다른 태양빛 아래 몸을 맡기면서 자신이 나아갈 길을 꿈꾸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먼 길의 흔적을 더듬어가려면 기존에 자신이 알던 모든 것을 버리고 가볍게 가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즉 모두에게는 떠남이 운명이라는 것과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가 모든 걸 버려야 한다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베르나르는 걷기의 의미에 대해서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서 굴복하고 싶지 않다. 나는 가야만 한다. 살아있는 한 인간은 가야 하니까. 걷는 것은 도약이며 움직임이다. 고독은 도피가 아니라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기에 고독을 제대로 음미해야 한다. 걷는 것은 조화로움을 만들고 또 자리 잡게 한다.”
나도 제주 올레길을 걸으면서 퇴직자가 가져야 하는 꿈의 의미와 실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이 든 사람의 꿈은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새로운 삶을 추구하면서 진정한 자아를 찾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사회나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얽매어 주어진 역할을 수행해왔지만, 은퇴 후 삶은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조직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난 만큼 본격적인 홀로서기에 나서야 한다. 홀로서기는 과거를 회고하거나 외부 시선을 의식하게 되면 결코 이룰 수 없다. 이제부터 남이 만들어 준 꿈이 아니라 자신이 희망한 꿈을 찾아야 한다.
꿈을 찾는 공부는 공자님 말씀대로 爲人之學(위인지학)이 아닌 爲己之學(위기지학)이 될 것이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부하는 대신 참된 나다움을 밝히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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