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4코스(표선해수욕장-남원포구)
제주올레 4코스는 표선해수욕장에서 시작하여 남원 포구에서 끝난다.
코스 시작점인 표선해수욕장에서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온도는 그리 낮지 않지만 바람이 드세어 추웠다. 겨울모자와 넥워머를 챙기고 본격 올레길에 나섰다.
해안가 돌밭 위를 걷자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회색 구름이 펼쳐져 있었다. 강풍이 부는 날씨에 회색 하늘의 바닷가 돌길을 걷다 보니 영화에서 본 우중 충충한 스코틀랜드 해안이 생각났다.
우리 일행은 강풍 때문에 말을 하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묵묵히 걷기만 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이 제주의 흔한 날씨인데 잠시 잊었을 뿐이다. 다행히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올레길 걷기를 재촉했다.
검은 현무암이 깔린 바닷가에는 해녀 동상이 외롭게 서 있었다. 추운 날씨에 꿋꿋하게 서 있는 해녀 상은 생활력이 강한 제주도 여인을 상징하는 듯하다.
올레길은 해안 돌밭 길로 계속 이어지다가 해안 도로를 만나자 포장도로로 연결된다. 해안 포장 도로변 올레길은 자전거길과 겹쳐 있어 서귀포 쪽에서 오는 바이커들을 종종 만날 수 있었다.
바이커들은 대부분 청년이고 더러는 젊은 처자들도 있었다. 추운 날씨에 격려의 인사라도 전할까 했지만 다들 쌩쌩이 지나가 말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올레길을 걷다 보니 바다 쪽으로 조그만 등대들이 계속 보였다, 배를 접안할 수 있는 부두 시설은 없지만, 등대가 서 있고 등대 쪽으로 조그만 시멘트 길이 놓여 있었다. 해녀 길이라고 표시된 것으로 보니 해녀들이 물질하러 갈 때 이용하는 길이다.
다시 도로 옆에 있는 올레길을 걷다 보니 세화리 해녀 식당 앞에 반듯한 돌탑 모양의 현무암 돌계단이 보였다. 광명등을 복원한 것이라고 안내판에 쓰여 있다.
광명등은 포구에 출입하는 배를 위해 불을 밝혔던 제주의 옛날 등대 이름이다. 포구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을 ‘불칙이’ 로 선정하여 저녁 늦게까지 불을 켜는 역할을 맡겼다고 한다.
어부들은 불칙이한 사람의 수고 대가로 잡아 온 고기를 나누어주면서 서로 상부상조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4코스에는 어촌계나 해녀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식당 간판을 여기저기 볼 수 있어 상부상조의 전통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올레길은 해안가 숲길로 들어섰다. 숲길은 제법 길었다. 바닥에는 천연 소재 매트를 깔아 걷기에 더욱 편했다. 올레길 옆에는 NH농협제주수련원이 있었다. 관광객을 위해 올레길을 새롭게 정비한 것 같다. 수련원 뜰 한구석에는 제주 출신 작가의 글을 제주 출신 서예가가 새긴 시비들이 놓여 있었다.
다시 숲길이 나오고 숲길 옆에는 궂은 날씨에 아랑곳없이 노란 들꽃이 깔려 있었다. 제주도는 육지보다 기후가 온화해 초겨울에도 다양한 꽃이 핀다. 11월 말이지만 동백꽃과 유채꽃도 볼 수 있었다.
바닷가 숲은 대나무‧관목․사철나무․동백나무 등 다양한 나무로 이뤄졌다. 바닷바람 영향 때문이라 해변에는 키 작은 나무들로 숲을 이루지만 도보객들에게 따가운 햇빛을 가려주는 고마운 그늘막이 되어준다.
올레길은 차도를 만나자 대로를 건너 토산리 마을로 가는 길로 연결된다. 해변으로 계속 길이 연결되어 있지만, 올레길은 대로를 가로질러 내륙 안쪽 마을로 향했다. 마을 안 길을 걷다 보니 4코스 중간 지점 안내 간새가 나왔다. 우리 일행은 중간 도착 스탬프를 찍고 나서 점심을 먹기 위해 알토산고팡이라는 간판이 붙여진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은 토산마을곡식(알토산)창고(고팡)를 개조한 것이다. 창고 건물이라 층고가 높고 안에는 복층으로 꾸며져 있었다. 아래층에는 식당 주방과 테이블이 놓여 있고 한쪽에는 아동 책들이 주로 꽂혀 있는 서가가 있었다.
식당에서는 마을 농장에서 재배한 귤을 판매하고 있었다, 귤 한 박스 값이 택배비를 포함 10㎏에 1만2천원, 15㎏에 1만5천으로 아주 저렴했다. 식당 주인한테 귤 값이 왜 이렇게 싸냐고 물으니 마을 주민들이 수확한 귤을 선과하지 않고 박스에 그대로 담아오기 때문이라고 알려주었다.
식당 주인은 “귤 농사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3분의 1이나 달해 농민들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선과 작업을 하지 않고 크기와 상관없이 박스에 담아 내온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다. 귤을 먹어보니 달고 맛이 있어 우리 일행은 주저 없이 2박스 이상 구매했다.
식당 밖으로 나오니 토산리 4.3 유적지라는 기념비가 있었다. 안내판에는 1948년 군경 토벌대가 토산리의 18세부터 43세까지 남자들을 집결시켜 표선리 백사장에서 모두 총살했다는 끔찍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3코스에서 걸었던 곱고 아름다운 표선해수욕장에서 양민 학살이 이뤄졌다고 하니 말문이 막혔다. 당시 희생된 토산리 주민이 무려 150명에 달했다고 한다.
올레길에 다시 나서려고 하는데 오후 2시인데도 하늘은 여전히 컴컴하고 바람마저 세차 마음이 무거워졌다. 절반 정도 왔지만, 아직 10㎞나 남았다. 올레길은 토산리 마을을 가로질러 차도를 지나다가 다시 해변 길로 이어졌다.
올레길은 오전처럼 해변을 끼고 이어지고 갈대밭을 만난다. 바닷가 갈대밭은 지친 도보 여행자들에게 지루함을 달래 주었다. 갈대숲을 보니 지난 봄에 들렸던 성산 일출봉 근처의 섭지코지 갈대숲이 생각났다. 갈색의 갈대숲, 검은 현무암, 푸른 바다, 회색빛 하늘, 거센 바람은 나에게 제주의 상징물로 이미 각인되어 있다.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빗방울이 뿌리기 시작했다. 다들 말을 하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걷기만 했다. 빗줄기가 더 세지기 전에 올레길을 마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걷기에 집중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멀리 등대와 포구가 보였다. 굽어진 길을 돌아서니 4코스 종착점을 표시한 올레 간새가 보였다. 점심 먹고 쉬지 않고 걸어 결국 남은 거리 10㎞를 두 시간 만에 돌파했다. 4코스 종점에서 올레 스탬프를 서둘러 찍고 숙소가 있는 서귀포로 돌아갔다.
올레길 4코스는 밋밋한 해안 도로변을 주로 끼고 있어 다소 지루했다. 4코스에서는 우리 일행 말고 다른 도보객들을 찾아볼 수 없어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그나마 올레길이 중간에 해안 길이 아닌 토산리 마을로 연결되어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오히려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지루함을 덜어주었다.
4코스 길이 단조롭고 평이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올레길에 대한 안내 정보가 없어 아쉬웠다. 도보객들의 지루함을 덜어주기 위해 중간중간 올레길 안내 정보와 함께 쉼터를 제공해주면 좋을 성싶다.
올레길을 걷다 보면 제주의 속살을 볼 수 있다. 걷다 보니 차로 보지 못한 제주의 자연을 감상할 수 있다. 코스마다 새로 개발한 바닷가 현무암 돌길과 바다를 끼고 조성한 해안가 작은 숲길은 올레길 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장소였다.
올레길에 처음 나설 때 개인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별로 지치지 않았다. 올레길 종주를 위해 매일 틈틈이 걸었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매사에 사전 준비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육체적인 피로보다 오히려 날씨 등 외부 환경과 심리적 요인이 올레길 완주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9월말 처음 올레길에 나설 때 태풍으로 인해 하루를 허비해 일정이 차질을 빚었다. 올레길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도 당일 걷기에 영향을 주었다. 인생사와 마찬가지로 외부적 환경이나 심리적 요인에 영향을 받지 않고 뚜벅뚜벅 걷는 것만이 올레길을 완주하는 길이 될 것이다.
올레길 내내 화두를 정년 이후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내심 정해두고 단단해져야 한다고 마음먹었지만 아직은 걷기에 급급하다 보니 이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정년이 가까워지면서 일에 대한 열정도 식고 책임감도 엷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제주 올레길에 나서면서 완주해야 한다는 목표 의식이 뚜렷해진다. 제주 올레길 완주는 나 자신과의 약속인데 나이 들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2019년 11월 25일)
[저작권자(c) 청원닷컴,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
[기사 제공자에게 드리는 광고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