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15-A 코스(한림항-고내포구)
제주 올레 15코스는 한림항에서 시작한다. 숙소를 나와 버스를 타고 한림항을 찾아갔는데 정류장을 잘못 내려 한참을 걷고 버스를 다시 타느라 시간을 많이 소비했다.
15코스 시작점인 한림항은 제주의 어선 포구와 달리 큰 부두로 화물선이 정박해있고 항만 배후지도 넓었다. 바다 건너에는 비양도가 가까이 보였다.
올레길은 한림읍 내 민가를 지나 들판이 나오자 코스 분기점이 보였다. 15 코스는 중산간 길로 연결되는 A 코스와 해안도로로 연결되는 B 코스로 나뉜다. 오늘 하루에 15코스와 16코스를 완주해야 하므로 거리도 짧고 걷기가 수월한 B 코스를 택했다.
들판에는 여러 밭작물이 심겨 있다. 제주도는 벼를 재배하기 힘들지만, 밭작물은 그런대로 잘 되는 것 같다. 옥수수와 메밀은 물론 조·수수 등 지금은 육지 밭에서 보기 힘든 작물들을 볼 수 있다. 최근에야 알았지만, 제주도에서 우리나라 메밀의 80%를 생산하고 있어 봉평에서도 제주도 메밀을 들여와 가공해 쓴다고 한다.
마을과 밭을 지나자 해안 도로를 만났다. 올레길은 이제부터 해안도로로 따라 쭉 연결된다. 해안가는 주상절리나 절벽 없이 현무 암석이 바닷가로 널리 깔린 완만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해안가에 「라신비」라는 비석이 있다. 비석문을 읽어보니 귀덕현에 새로 생긴 마을로 비단같이 곱고 아름다운 절을 지닌 라신동을 소개하는 비석이다.
그러고 보니 이 지역은 바닷가로 현무 암석이 널리 깔려 있을 정도로 경사가 완만하고 바다도 잔잔해 보였다. 바닷가에 용천수 우물이 있다는 안내판이 있다. 올레길에서 북쪽 조천 지역에서 용천수를 많이 봤지만, 제주 해안 어디에서든지 쉽게 용천수를 볼 수 있었다. 제주에 내린 비가 산간 지역 천에서 그냥 흘러내려 해변 인근에서 고여 샘물터를 만든다.
해안가로 특이하게 인어상이 서 있다. 코펜하겐에 있는 인어 공주도 아니고 인어상이 제주 해안에 왜 서 있을까 궁금해 안내석을 상세히 읽었다.
“예쁜 인어가 귀덕리 동네 바다에서 놀다가 크게 다쳤는데 이곳 굼들애기물에 들어가 씻으니 바로 나와 동네 사람들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돌아간 다음부터 동네 사람들도 아프면 그 물에 들어가 씻어서 나았다”라는 이야기가 쓰여 있다.
용천수인 『굼들애기물』이 약수로 쓰일 정도로 좋은 물이라는 강조하는 것이지만 인어 이야기가 덴마크에서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도 전해 내려온다고 하니 왠지 낯설기만 하다. 다행히 인어상은 날씬한 서양 아가씨가 아니라 제주에서 쉽게 마주치는 해녀 아줌마처럼 푸근하다.
올레길을 계속 걷자 이번에는 『한수풀해녀학교』 건물이 보였다. 서쪽 지역도 동쪽 지역처럼 해녀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귀덕 전통 포구에 들어서니 포구 한쪽에 카누를 탄 사람들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이 관광객 유치를 위해 방파제를 막아 낚시 체험과 카누 타기 등 관광 상품을 제공하고 있었다.
포구 안내문을 보니 귀덕 포구는 제주 전통 포구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포구를 안캐‧중캐‧밖캐 등 전통 방식인 3중 구조로 축조한데다 돌 방파제를 겹겹이 쌓아 태풍에도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귀덕 포구는 제주의 전통 굿인 영등 본풀이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바람의 여신 영등할망이 제주로 들어올 때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귀덕 포구다. 포구 소공원에는 영등할망을 가운데로 두고 영등대왕과 영등하르방 돌상이 바다를 등지고 서 있다.
영등할망은 음력 2월 1일 제주에 왔다가 큰바람을 뿌리고 제주를 떠나는 바람의 신이다. 영등할망이 가져온 바람은 겨울과 봄 사이에 불어오는 서북 계절풍으로 할망의 변덕처럼 바람이 거세고 날씨 변화도 심하지만, 본격적인 봄을 예고해 준다.
영등할망은 제주도 해안 구석구석에 해산물의 씨앗을 뿌려 풍어와 풍년을 주는 신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제주 해녀와 어부는 영등할망에게 풍어와 풍년을 빌면서 굿을 해왔으며, 지금은 성대한 축제까지 연다고 한다.
영등대왕은 영등할망이 영등바람을 뿌리며 제주의 새봄을 준비하는 동안 영등나라의 긴 겨울을 지키는 외로운 대왕이며, 영등하르방은 제주를 찾아가는 영등할머니의 바람 주머니에 오곡의 씨앗과 봄 꽃씨를 담아주는 신이다.
소공원을 지나자 귀덕 포구는 복과 덕이 열리는 복덕개(福德開) 포구라는 돌비석이 서 있다. 올레길이 바닷가 쪽으로 현무 암석이 깔린 돌길로 조성되어 있어 짠물 냄새를 마시면서 걸어갔다.
올레길에 금성천을 가르는 다리가 나왔다. 금성천도 바다 가까이에서 큰 내를 이룬다. 올레길은 이제 한림에서 애월로 진입한다.
정자 앞에 코스 중간점을 안내하는 간새가 있어 스탬프를 찍고 정자에 올라 잠시 쉬었다. 정자 앞에서 바라보는 바다색은 푸른 계열의 색깔이지만 투명한 비취색과 짙은 쪽빛으로 나눠진다.
올레길은 곽지 해수욕장을 만난다. 해수욕장은 백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고 모래도 가늘어 부드러워 보였다. 모래사장 한가운데에는 남·여 노천탕이 있어 이채로웠다.
곽지 해수욕장도 협재 해수욕장처럼 하얀 모래, 쪽빛·비취색의 바다, 옅은 푸른색 하늘이 어울려 그야말로 색의 향연이 펼쳐진 듯했다. 사람들이 모래사장을 거닐면서 멋진 풍광을 즐기고 있다. 모래사장 한쪽에는 다가오는 여름을 대비해 불도저가 부지런히 모래를 정리하고 있다.
곽지 해수욕장을 빠져나오니 올레길은 바로 옆에 바다를 끼고 난 해안 산책로로 연결된다. 바다 쪽으로 용암 괴석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다.
화산 폭파 당시 흘러내린 마그마가 바닷물을 만나 굳으면서 다양한 형태의 바위 모양을 만든 것 같다. 검은 바위와 돌로 이어진 해안 산책로 언덕에 오르니 애월 해변이 한눈에 들어왔다.
올레길은 해안가로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계속 이어진다. 눈으로는 바닷가의 용암 괴석을 보고 귀로는 철렁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걷는 해안 올레길은 도보객들에게 늘 기쁨을 준다.
그렇지만 휴일이라 관광객들이 많아 여유 있게 거닐 수 없었다. 게다가 바닷가로 줄지어 서 있는 카페에서 시끄러운 음악과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 때문에 철렁이는 파도 소리마저 귀에 들어오지 않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2년 전에 어렵게 주차하면서 이곳의 카페를 이용한 적이 있지만, 제주 해안가의 절경에 계속 카페가 난립해 들어서는 것은 이제 아니라고 생각했다.
카페에서 맛있는 차를 마시면서 유리창 너머 멋진 바다 풍경을 즐길 수 있지만 나는 야외에서 아름다운 자연과 부딪쳐 오감을 느끼며 걷는 것이 더 좋다. 멋진 카페는 제주 아닌 곳에서도 쉽게 찾아갈 수 있지만 힘들게 온 제주에서는 자연을 만끽하는 것이 우선이다.
올레길을 걷다 보니 카페촌 한가운데 장한철 생가인 초가집이 보였다. 장한철은 조선 영조 때 애월에서 태어나 과거를 보러 배를 타고 한성으로 가다가 풍랑으로 후쿠 제도(오키나와)에 표착하고, 그 경험을 담은 표해록을 저술했다.
제주시에서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최근에 이곳에 생가를 짓고 산책로 이름도 한담로에서 장한철로로 바꾸었다. 『애월한담산책로』라는 이름이 훨씬 예쁘고 정감이 가는데 산책로 이름마저 바꾼 것은 아무래도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촌을 빠져나오니 올레길은 조용한 바닷가로 이어지며 고요함을 다시 찾았다.
바닷가 들판 길을 따라 걷으니 바닷가 쪽으로 노란 선인장꽃들이 보였다. 처음 보는 것이지만 바닷가에 핀 선인장꽃은 여느 들꽃처럼 예쁘고 소담스럽다. 선인장이 원산지인 멕시코에서 어떤 경로로 해서 이곳에 와서 자생하고 있는 것이 전혀 짐작이 안 갔다. 설마 선인장 원산지인 아메리카 대륙에서 바람을 타고 날려온 것인가 궁금하기만 했다.
올레길은 개월 포구로 들어선다. 개월 포구는 해안도로와 방파제로 둘러싸인 조그만 포구이다. 옛날에는 개월이 제주의 중요한 방어 거점이자 군사 요충지로 포구 역할이 컸겠지만, 지금은 소형 어선만 드나드는 작은 포구로 남았다.
올레길이 민가로 들어서니 현대오일뱅크의 물류센터가 나왔다. 기름이 저장된 대형 탱크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데 문이 개방된 채 사람마저 보이지 않아 경비가 다소 허술해 보였다. 민가 돌담 사이를 지나니 15코스 종점이자 16코스 시작점인 교내 포구가 나왔다.
(2022년 6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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