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7 코스(서귀포-월평)
우리는 태풍 리링이 제주로 다가온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2박 3일 일정으로 제주로 향했다.
김포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제주공항에 내리자마자 일기예보대로 거센 비바람이 우리를 맞아줬다. 제주공항에서 600번 리무진 버스를 타고 숙소인 서귀포 올레 스테이로 갔다. 서귀포 올레스테이는 제주올레 여행센터이자 투숙객을 받는 게스트하우스다.
우리 일행은 짐을 풀자마자 올레 스탬프 책자와 안내 지도를 챙기고 숙소에서 나왔다. 다행히 큰비가 내리지 않아 우의를 입고 우산을 썼다. 가끔 돌풍이 우산을 덮쳤지만 우리는 묵묵히 거리의 올레 표지판을 따라나섰다.
해안 근처 도로에 올레 표시판을 보고 계단으로 내려가니 ‘돔베낭길’ 표지판이 나왔다. 돔베는 제주어로 도마, 낭은 나무라는 뜻으로 도마처럼 잎이 넓은 나무가 많았다는 데에서 길이름이 유래되었다.
돔베낭길은 서귀포 해안 절벽 길로 이전에도 관광을 위해 여러 번 왔던 곳이다. 항상 관광객이 붐빈 곳이지만 오늘은 강한 비바람 때문에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었다.
해안 절벽 길을 따라 걸으니 가까이 외돌개가, 멀리서 문섬, 새섬, 범섬이 보였다. 외돌개는 높은 파도에도 굳건하게 홀로 우뚝 서 있었다. 강한 돌풍 때문에 주변의 풍경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폭풍우 속 바다를 배경으로 인증 사진 몇 장만 찍고 걸음을 재촉했다.
해안 주상절리로 내려가는 길은 아예 봉쇄되어 차도를 따라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민가 옆에 있는 도로를 우회해 걷자 대로변에 편의점이 보였다. 편의점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다시 걸었다.
민가에서 해안가로 접어 들어가자 속골 해안으로 가는 길이 나왔다. 속골은 인근의 비교적 높은 산에서부터 깊은 계곡을 이뤄 바다로 이어진 곳이다. 조그만 다리를 건너니 비닐하우스 식당이 나왔다. 주인은 있지만, 손님은 없었다.
나즈막한 언덕길이 나왔다. 난대림 나무 사이에 조그만 숲을 이룬 정글 터널길이다. 올레길을 조성하면서 새로 만든 자연생태길 ‘수봉로’였다. 수봉로는 염소가 다니던 길에 올레지기들이 삽과 곡괭이로만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길이다.
다시 해안가로 나왔다. 바다에 높은 파도가 일고 있지만 해안 길은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았다. 해안 길은 현무암 바위와 돌 위에 걸쳐 있어 검은색 일색이다. 자갈길을 빠져나오자 다시 흙으로 다져진 들길이 나왔다.
들길은 양방향에서 사람이 다닐 정도로 좁았고 길옆 들판에는 이름 모를 야생화가 피어 있었다. 한참 걷다 보니 옆에 군막사와 같은 콘크리트 건물이 보였다. 가까이 보니 벙커 하우스라고 이름이 걸린 카페다.
해안 들길에서 민가와 도로로 들어갔다가 다시 바다를 만났다. 바닷가에 연해 있는 들길을 따라 걷고 나니 차도가 나왔다. 차도를 따라 걷자 바다 쪽으로 3면의 방조제가 펼쳐진 법환 포구가 나왔다.
법환 포구는 TV에서 태풍이 불 때 파고와 풍속 등 기상 상황을 중계하는 서귀포의 남쪽 포구로 유명한 곳이다. 마침 방송국 관계자들이 태풍 상황을 보도하기 위해 중계차에서 준비 중이었다.
법환 포구에는 그물과 물고기로 형상화한 잠녀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잠녀상은 연약한 여자의 모습이 아니라 건강한 장정의 체구 모습을 하고 있어 다소 특이했다.
포구 중앙에는 고려 최영 장군 승전비가 우뚝 서 있었다. 고려 공민왕 때 최영 장군은 이곳에서 몽골군과 그 잔당(묵호)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법환 포구 주변 해변에 고려 시대 항몽 전쟁과 관련한 제주말로 된 지명들이 많았다.
배염(배연)줄이라는 지명은 최영 장군 일행이 목호군을 쫓아 범섬으로 건너갔다는 사실에 유래한다고 안내판에 쓰인 글을 봤다. 막숙ㆍ배염줄이ㆍ오다리ㆍ휜돌밑ㆍ두머니물 제주말 지명이 어떻게 해서 유래가 되는지 안내문을 읽어도 전혀 유추할 수 없었다.
해안가 검은 자갈길인 ‘일강정 바당올레’가 나왔다. 이 길도 원래 있던 길이 아니라 올레지기들이 검은 바위나 자갈을 골라 메워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평탄한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올레 중간 쉼터에 도달하자 ‘서건도’라는 조그만 섬이 눈에 들어왔다. 하루 두 번씩 썰물 때마다 바닷물이 갈라지면서 뭍에서 섬까지 이어지는 길이 나타나 사람들이 걸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섬에 사람들이 다니는 산책로를 멀리서 볼 수 있었다.
서간도 앞 중간 쉼터 가계는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중간점 스탬프만 찍고 바로 길을 나섰다. 마을 길을 따라가니 물이 제법 흐르고 있는 ‘악근천’을 만났다. 바다 가까이 놓여있는 다리 길은 통행이 금지되어 큰길을 따라 우회했다.
다시 올레길을 따라가니 켄싱턴 리조트로 들어갔다. 리조트 내 바닷가 쉼터에 올레 우편함과 우편 엽서 모양의 포토존이 설치되어 있었다. 궂은 날씨지만 우리 일행은 정자에서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말없이 바다를 구경했다. 파도가 높이 일고 비가 세차게 내리는 바다를 보니 착잡한 기분이 들었지만 또 한편으로 자연과 일체가 되어 몸과 마음이 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리조트를 돌아 나서니 제법 강폭이 넓은 ‘강정천’이 바다로 이어졌다. 강정천 옆길 리조트 쪽 암석은 그냥 바위가 아니라 주상절리이다. 오래전 용암이 흘러내리면서 급하게 식으면서 형성된 화석 지형이다.
그러고 보니 강정천 주변은 용암이 흘러내려 식은 검은 현무암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한라산에서부터 용천수가 흘러 내려와 강정천 물은 맑아 보였다.
오래전 용암이 흘러내리면서 급하게 식으면서 형성된 화석 지형이다. 그러고 보니 강정천 주변은 용암이 흘러내려 식은 검은 현무암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한라산에서부터 용천수가 흘러 내려와 강정천 물은 맑아 보였다.
올레길은 해안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강정 마을을 가로지르는 차도로 들어섰다. 차도 주변에는 군사기지 조성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올레길은 바다 쪽으로 ‘제주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라는 긴 이름이 붙여진 제주 해군기지 건물을 두고 대로를 건너 다시 마을 안길로 들어갔다. 자연을 뭉개고 인공으로 시설을 만들고서 미항이라고 이름을 붙인 연유를 알 수 없었다. 흙길이 아닌 포장된 도로를 한참 걷다 보니 지루하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했다.
다시 바닷길이 나왔다. 날씨는 흐리지만 멀리 마라도와 산방산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불지만 세차지 않아 걷기에 좋았다. 흙과 돌이 섞인 길을 걷다 보니 조그만 ‘월평 포구’가 나왔다.
월평 포구는 달빛을 은은하게 품은 적고 아름다운 포구라는 안내판을 달고 있었다. 폭풍우라 바다에 나가지 못한 소형 어선들이 묶여 있었다. 월평 포구에서 해안절벽 위로 올라서면 월평 해안 경승지를 구경할 수 있지만 아쉽게도 태풍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다.
올레길 표지를 따라 걸어가니 굿당 산책로로 들어섰다. 산책로는 해안 절벽 길로 숲이 우거져 있다. 이곳은 외돌개 주변 근 돔배낭길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개발이 덜 되어 때가 묻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굿당 산책로를 한참 걷고 있는데 뒤에 있는 일행이 버스 정류장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7코스 종점인 월평마을 야왜낭목쉼터까지 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오늘 태풍 때문에 정신없이 7코스 올레길을 걸었다. 서두르다 보니 올레길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 코스 앞부분과 뒷부분을 제대로 걷지 못한 것 같아 찜찜했다. 오늘은 일단 거친 비바람 속에서 중단하지 않고 올레길을 계속 걸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올레 7코스는 해안 경관이 뛰어나 아름다운 올레길로 명성이 높은 곳이다. 특히 서귀포 외돌개 주변 돔배낭길은 수려한 경관 때문에 관광객들이 붐비는 곳이다. 개인적으로 이번에 걸으면서 7코스 구간 중 속골에서 법안 포구로 가는 해변 길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해변 길은 절벽 길이 아니고 해안을 따라 자갈이나 흙으로 조성된 길이다. 절벽 길에서는 멀리서 바다를 바라봐야 하지만 해변 자갈길과 흙길은 바로 옆에서 바다를 볼 수 있어 좋았다. 태풍 때문에 높은 파도가 해안으로 밀려오지만, 귀로는 거친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눈으로는 길 건너 들꽃들을 함께 볼 수 있어 오감 속에서 자연을 체험할 수 있었다.
나는 오늘 올레길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솔직히 비바람 때문에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걷기만 한 것 같다. 걷는 것은 자신을 비우는 일이라고 누군가 이야기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오로지 걷기에 집중함으로써 자신을 비울 수 있었다. 비워야만 다시 채워질 것이다.
(2019년 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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