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정인이 학대 사망 사건에 대한 단상
- 인간 본성에 대하여, 정인이 학대 사망 사건에 대한 단상(斷想)
인간은 도대체 약자에 대한 ‘연민’ 따위의 감정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일까요, 아니면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온전한 생존을 위해 익힌 한 가지 생존 방편일 뿐일까요.
디지털 세상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건의 테러와 살인 뉴스를 접하고, 프랑스에서 이슬람 테러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들,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조의를 표하지는 않습니다. 커피가 식으면 맛이 없으니까요.
뉴스에 둔감해지고, 아예 무관심하던 일상에, 최근 시청한 ‘정인이 학대 사건’을 다룬 SBS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 싶다’는 충격이었습니다. 학대에 길들여지면 두 살 바기 아기조차 표정을 잃을 수 있고, 밀어버린 유모차에서 스스로 손잡이를 잡으려고 발버둥 친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커피를 마실 수 없습니다.
거창한 윤리설을 접어두고, 아무런 법과 도덕을 배우지 못한 자연 상태의 젊은 미개인이 자신의 생존이 위협받지 않는 한, 어린아이의 젖병을 빼앗거나 살해하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연민을 지니고 태어나면서, 인류의 생존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가설이 송두리째 의심 받는 사건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철저하게 사회적 약자였지만, 아이를 구제하려는 사회적 제도조차 한 젊은 부부의 일시적 과시욕과 편익 앞에서 철저하게 무기력했습니다. 정인이가 살다간 세상은, 탄생과 죽음의 전 과정에서 ‘악의 본성’이 온통 뒤덮고 있을 뿐입니다.
1983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윌리엄 골딩은 ‘파리 대왕’에서 인간을 배설물을 끊임없이 탐욕하는 파리로 묘사합니다. 2021년 초 대한민국, 윌리엄 골딩의 문학적 경고는 타당해 보입니다. 그는 아무런 통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무인도에서 소년들이 벌이는 학살 과정을 보여주었고, 정인이가 살다간 곳은 그러한 무인도의 현재 진행형입니다.
뒤늦게 현장을 살핀 정치인들은, 온갖 법을 쏟아내지만 역시 주변을 맴도는 또 다른 ‘파리’의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과연 법과 제도로 앞으로는 이 같은 일을 막아낼 수 있을까, 회의감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세상은 어차피 정글의 한 복판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작은 우리 사회의 ‘부끄러움과 연민’이 다큐멘터리에서 엿보입니다. 경기도 양평의 정인이 묘소를 찾는 수많은 조문객과 그들이 묘소에 놓고 간 부끄러움의 반성과 흔적들, 그리고 학대 사실을 지체 없이 신고한 한 의사와, 사망 전날 아이를 돌보던 보육교사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윌리엄 골딩에 대한 미약한 항거로 보입니다. 인간이 지닌 최소한의 양심과 연민의 감정에 대한 단서지만, 아이의 묘소를 두고 여전히 이를 입으로 내놓기조차 부끄럽습니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원에 안치된 정인의 묘지. 정인은 생후 16개월에 양부모의 아동학대로 죽었다.
[사진=위키피디아]
이제 공자님의 힘을 빌려야겠습니다. 그의 곁에는 끼니를 잇지 못하고 학문을 수양하며 굶어 죽은 제자 안회가 있었고, 이와 달리 춘추시대 전설적인 도적 도척은 사람의 생간을 회로 썰어 먹으면서도 평생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왜 안회처럼 수양해야하고, 왜 도척처럼 살면 안 되는지 공자에게 묻는다면 돌아올 답변은 아주 썰렁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모두 이러한 인간다움을 지니고 태어나는지, 여전히 선뜻 공자님께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반추해 보아도, 스스로를 포함해서 인간이 아닌 경우가 더욱 많아 보입니다. 수많은 유튜버들이 최근 석방된 성범죄자 조두순을 추적한답시고, 그 집 앞에서 마치 향연을 벌이는 듯한 모습을 보면서, 인간에게 부끄러움이란 10원짜리 광고수익에도 접을 수 있는 세상임을 실감합니다.
그래서 질문을 순진한 윤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가 제기한 방식으로 조금 구체화해봅니다. 만일 신이 당신에게 “학대받던 한 어린아이가 내일 죽는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그 아이를 오늘 당신이 구출할 수 있다고 알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입니다.
다만 구출과정에서 당신은 손가락을 하나 잃어야한다고 덧붙인다면, 정인이 묘소를 찾는 것처럼 쉬운 일인지 자문해 봅니다. 지원자가 끊어질지, 이어질지, 우리는 타인에 대한 연민의 실천 과정에서 과연 얼마나 대가를 기꺼이 치를 의사를 지녔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불러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을 현대판으로 수정해 보겠습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부분입니다.
“행복한 도시, 축복받은 시민의 도시인 오멜라스에는 왕도 노예도, 광고도 주식 거래도, 원자 폭탄도 없는 곳이다. 독자들이 이곳을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곳으로 상상하지 않도록, 작가는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덧붙인다. 오멜라스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공공건물 지하실에, 어쩌면 대궐 같은 저택 천장에 방이 하나 있다. 방문은 잠겼고, 창문은 없다. 이 방에 아이가 하나 앉아 있다. 지능도 떨어지고 영양 상태도 안 좋은 아이는 방치된 채로 비참하게 하루하루를 연명해간다. (중략) 아이가 그 비참한 곳에서 나와 햇빛을 본다면,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위로한다면 물론 좋은 일이겠지만, 그날 그 시간부터 오멜라스의 모든 풍요로움과 아름다움, 기쁨은 시들고 파괴될 것이다. 그것은 행복의 조건이다.”
이제, 새끼손가락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잃어야합니다. 답변은 크게 두 가지로만 나누겠습니다. ‘아예 외면하거나, 가슴 한 구석이 찜찜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과,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들’, 이렇게 단순화해 봅니다.
후자가 많다면, 그 사회는 시일이 다소 오래 걸리더라도 인간들의 양심에 맡겨 운영하면 될 것입니다. 다만, 전자가 더 많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어차피 각자 사는 세상, 그래도 함께 살아야하니까, 잘나고 투명한 이성으로 법망을 엄격하게 갖추어 가혹하게 처벌해야할 것입니다. 유독 범죄자에게 관대한 어설픈 아량 따위는 집어치우고, 그 대가를 철저하게 묻는 것이 이성적인 합리성의 원칙에 타당합니다.
구타로 죽어가는 약자에 대한 연민은 접어두고, 가해자에게만 유독 연민과 동정을 보내도록 법이 설계되었다면, 그 사회는 연민도 이성도 포기한 모순적 공간입니다. 대한민국의 현주소는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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