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경제를 보는 상반된 시각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 시장 경제를 보는 상반된 시각
보수와 진보는 우리나라 정치판의 뜨거운 화두인데요, 단어 뜻 그대로만 보면 보수와 진보는 각각 현실을 안정 속에서 보전하고 지킨다는 입장과, 낡은 제도를 고쳐 개혁해 나간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는 좋은 의미에서의 뜻풀이가 되고, 보수는 자칫 현실에 대한 집착으로 안주하면서 정체(停滯)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진보는 무책임한 제도나 정책 실험으로 시행착오를 일으켜 멀쩡한 사회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치, 사회, 교육 등의 사회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하는데 보수와 진보는 첨예하게 대립하는데요, 여기에서는 ‘먹고 사는 문제’, 즉 시장 경제에 대한 논의로 국한하겠습니다. 흔히 보수와 진보를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 편으로 이원화해서 생각하는데요,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핵심과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자유 시장 경제 체제를 채택하고 있어, 시장 기능에 강한 신뢰를 가지고 이를 지지할 경우 일단 보수로 분류됩니다.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보이지 않는 손’에 따라 작동되는 시장경제는 경쟁과 효율성을 그 축으로 삼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적 재능이나 사회적 지위, 계급 등이 유리한 사람들은 시장 시스템에 우호적일 것입니다. 자유 경쟁을 통해 사회 발전과 혁신이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 강자와 보수 진영이 서로 겹치게 됩니다.
이와 달리 시장의 잔혹성과 폭력성에 주목하고, 사람이 저마다 타고난 여건이 다른 만큼 일정한 제도 개입을 통해 한계를 보완해서 사회적 형평과 복지를 구현하자는 입장은 진보가 됩니다. 이른바 정부의 ‘보이는 손’을 통해 도저히 살기 힘든 사회의 약자도 먹고 살 수 있도록 시장 기능을 수정, 보완하자는 것이지요.
이는 주로 제도와 세금을 통한 개입으로 가시화되는데요, 여하튼 시장 경제의 효율성을 필연적으로 해치게 됩니다. 세금이 붙는 순간, 생산자와 소비자에게 아무래도 ‘불필요한 비용’이 발생해 시장은 위축되고 자원의 효율적 분배를 가로막게 됩니다. 진보 정권에서 늘상 경제가 삐걱거리는 이유도 이러한 태생적인 한계 때문입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못사는 책임을 보수는 개인의 나태와 무능으로 돌리지만, 진보는 사회 구조의 모순에 주목하지요. 진보 진영에서 애덤 스미스의 충실한 후계자 하이에크를 ‘하이에나’로 비유하고, 영국 복지를 선도한 베버리지를 ‘귀여운 비버’로 묘사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빵을!' - 케테 콜비츠, 1924년 작 [출처 : WikiArt.org]
그렇다면 이 때 대중은 어떻게 비유될까요, 진보에 따르면 대중은 시장의 광기에 휩쓸리는 수동적인 객체로 설정됩니다. 그러니까 지상을 보지 못하고 땅속에서 열심히 제 살길만 찾아 헤매는 ‘두더지’ 정도로 비유할 수 있는데요, 이 때 국가가 나서서 그 방향성을 바로 잡아 주어야 되는, 탐욕적인 다수이기도 합니다.
진보 진영에서 ‘대중은 개, 돼지’라는 말에 몹시 흥분하는 사실은 아무래도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각 사회에 따라 상대적으로 적용됩니다. 북한이라면 시장 경제를 도입하자는 진영이 진보가 될 것입니다.
흔히 언론 매체 중에서 조선, 중앙, 동아, 매경 등을 보수로, 경향, 한겨레, 오마이뉴스 등을 진보 진영으로 분류하는데요, 이들이 현안을 다루는 방식도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가령 교육 문제에 있어 학업 성적이 부진한 이유를 보수는 학생의 게으름으로, 진보는 대물림되는 사회 구조와 계급의 모순으로 보게 됩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가난할수록 비만율이 높아지는 사회 현상을 우려, 한때 ‘비만과의 전쟁’을 국가 차원에서 선포했는데요, 비만 계층들에게는 체중을 조절할 경제적 여유와 환경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시각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진보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지요. 하지만 보수의 시각이라면, 절제력이 부족해서 살쪄놓고 ‘나라 탓, 세상 탓’만 하는 게으르고 뚱둥한 불평쟁이에 불과할 뿐입니다.
논의를 살짝 깊게 해서 두 진영이 자신의 철학적 근거를 찾아 제시하라고 요구받는다면, 미국의 두 사회 철학자와 맞물립니다. 바로 로버트 노직과 존 롤스입니다. 두 철학자 모두 근본적으로 자유 시장과 경쟁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이로 생기는 소유권을 두고 시각이 엇갈립니다.
우선 노직은 현대 자유주의를 대표하는데요, 공동체가 개인의 집합에 불과하며 개인을 위해서만 존재하므로 공동체는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국가는 쓸데없이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에 비해 롤스는 공정한 상황에서만 올바른 정의의 원리가 합의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원초상태와 무지의 베일이라는 일종의 사고실험을 도입합니다. 이를테면 10명의 사람들이 곧 지구에 태어나는데, 자신이 어떤 재능과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공정한 사회 구조를 설계해 보자는 것입니다. 탄생 후에 자신이 얻을 ‘계급장’을 떼고 논의를 한다면, 그리고 극단적인 도박 성향의 사람이 아니라면, 한 두 명의 재능 있고 부유한 상류층이 나머지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사회를 설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절차적 가정입니다.
이에 따라 개인이 지닌 천부적 재능이나 사회적 지위, 재산 등 천부적이고 우연적 요소들은 출발점의 평등을 훼손하는 만큼 모든 사람이 공정한 기회를 갖도록 수정하자는 것이지요. 이야기가 조금 어려워졌는데요, 다음의 사례에 대한 답변을 통해 보수와 진보의 시각차를 정리하면서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라오서의 소설, ‘낙타샹즈’의 줄거리입니다.
샹즈는 젊고 힘이 센데다 자신의 인력거를 가지고 있는 부류에 속했다. 이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1년, 2년 아니 적어도 3~4년 내내 한 방울, 두 방울, 아니 몇 방울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땀을 흘린 다음에 겨우 그 인력거를 마련한 것이다.(중략) 그는 총명하고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자신의 소원을 현실로 만들 수 있었다.
전쟁 소식이 전해졌다. 병사들이 큰 차, 작은 차, 인력거 할 거 없이 모조리 빼앗아 간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러나 샹즈는 돈을 벌기 위해 인력거를 끌고 나섰다가 결국 군대에 인력거를 빼앗겼다. 샹즈는 다시 악착같이 절약했는데, 이전과 달리 늙거나 허약한 다른 인력거꾼의 벌이를 빼앗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을 했고, 결국 다시 인력거를 샀다. 그러나 의사의 진료를 받지 못한 채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되면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 인력거를 팔게 되었다. 그 후 샹즈는 담배와 술을 가까이 하게 되고, 더 이상 필사적으로 일하지 않게 되었다.
노력에서 멀어질수록 자꾸만 자신이 처량해졌다. 전에는 아무것도 두려운 게 없었는데, 지금은 자꾸 편안한 것만 생각했다. 바람이 불거나 비만 와도 일을 나가지 않았다. 한가할수록 게을러지고, 할 일이 없으면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자꾸 놀 것, 먹을 것이 필요했다. ‘이렇게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늘 대기 중인 말, 그간의 경험이 남긴 말이 떠올랐다.
“나라고 노력 안 해본 줄 알아? 그래봤자 털끝만치도 남은 게 없잖아.”
이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답변은 분명하게 달라집니다. 당신이 진정한 보수 성향이라면, ‘역시 실패하는 인간은 끈기가 부족하고 쉽게 유혹에 빠져 든다’는 교훈을 얻고, 열심히 자기 일에 충실하자고 스스로 다짐할 것입니다. 이에 비해 ‘이건 아무래도 쫌’이라고 생각한다면 일단 진보 진영으로 기울게 되는데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국가가 이러한 약자를 돕지 않는다면, 무엇하러 존재하는가‘라는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선다면 행동하는 진보의 영역에 서게 됩니다.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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