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VS 실천/강신주』를 읽고
철학이 역사와 만나다. 철학이 역사와 만나면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와닿는다.
철학자 강신주는 『철학 VS 실천』이라는 책을 통해 역사적 사건이 철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려준다. 저자는 구체적으로 19세기 서양의 파리코뮌과 우리의 동학 집강소라는 공동체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과 철학적인 의미를 짚어준다.
파리코뮌과 집강소는 당시 억압받은 피지배계급 민중들이 자율적으로 만든 사회 공동체이었다. 저자는 파리코뮌으로 자본론 저자 마르크스를, 집강소로 동학 교주 최제우를 각각 소환한다. 파리코뮌과 집강소는 자유로운 공동체의 이념이며, 마르크스가 인간사회로, 최제우가 人乃天(인내천)으로 꿈꾸었던 공동체의 모습이다.
동학 농민들은 조선 정부와 일제의 억압과 독재를 타파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동학의 집강소는 빈부귀천의 차별을 해소하여 인내천 즉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간 존중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공동체였다.
책은 ‘19세기 찬란했던 마르크스의 테제’라는 부제를 단 만큼 마르크스의 정치 철학에 상당 부분 할애된다.
특히 저자는 “마르크스가 파리코뮌을 직시하고 통찰하면서 파리코뮌의 공동체 정신을 자신의 철학으로 완성했다”라고 강조한다.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에서 억압과 혁명의 관건이 생산수단 독점을 여부에 있다는 자신의 지론이 입증됨을 보았으며, 또한 모든 인간이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사회-인간사회라는 이념이 파리에서 탄생하는 것을 지켜봤다. 마르크스는 파리코뮌에서 자신들의 목숨을 버리고 인간 사회 공동체를 조성하려고 있던 민중들의 삶을 자기 철학으로 담았다.
마르크스가 27세에 완성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는 그동안 후세 학자들에 의해 청년 마르크의 미성숙한 사유의 단편으로 이해되어왔지만, 저자는 이 문건이야말로 마르크스 철학의 정점이자 완성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노동계급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대상적 활동의 주체이고 노동계급에게 대상적 활동의 역량을 관철하는 사회가 인간사회라는 생각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마르크스는 실천과 무관한 철학을 거부하고 실천적 전망을 열어놓는 철학을 완성하려고 했으며, 대상적 활동과 인간사회로 요약되는 마르크스의 이러한 철학은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정치 철학의 핵심 과제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파리코뮌을 관찰했고, 코뮌주의야말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대립이 사라진 사회, 소수 지배계급과 다수 피지배계급으로 구분된 억압사회를 폐지하자는 인간 사회 이념의 실천으로 인식했다.
저자는 마르크스의 인문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사상은 후세에 이르러 후계자들에 의해 크게 변질되었다고 지적한다.
엥겔스는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해 사회적 부가 넘쳐날 때까지 생산력을 좌우하는 지배계급을 긍정해야 하고, 그가 원하는 생산력 발전은 결국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더 착취해야지만 가능하다고 봤다. 엥겔스에 이어 레닌ㆍ스탈린도 생산력이 어느 수준에 도달해야 자본주의 체제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이행될 수 있다고 보고 생산력 발전을 위한 국가기구에 의한 통제를 당연시했다. 이로 인해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ㆍ중국 등지에서는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로 치달았고, 유럽에서는 사회주의가 아닌 기형적인 사회민주주의가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저자는 마르크스가 처음에는 사회 발전 핵심이 생산력에 달려 있다는 엥겔스의 이론에 동조했으나 자본론을 통해 생산력이 아닌 생산수단과 생산관계를 중요시했고 일하는 사람이 생산수단과 생산을 함께 공유하는 코뮌주의를 표방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연구 대상을 자본주의적 생산수단이나 그에 상응하는 생산관계 그리고 교환관계라고 명시함으로써 엥겔스주의로부터 단절을 시도하고 코뮌주의 정신을 되찾으려 했다.
저자는 “파리코뮌이 마르크스의 이론적 확신에 현실적 근거를 제공했음은 자본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라고 강조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에서 생산수단 공유가 코뮌 사회의 기초가 되며, 소수 자본가계급에 의해 빼앗긴 생산수단과 노동시간을 되찾아 개인적 소유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 사회적 해방의 정치적 형식이라고 언급했다.
저자는 “사회민주주의와 코뮌주의나 사회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라고 지적한다.
코뮌주의나 사회주의는 생산수단과 폭력 수단 나아가 정치 수단 등 일체 삶의 수단 독점을 금지하는 반면에 사회민주주의는 이를 허용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계급의 존재를 긍정하고 그들의 잉여가치를 덜어내어 노동계급에게 분배하겠다는 이념을 중시한다. 엥겔스처럼 사회민주주의에 투항하는 순간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국가주의에 오염될 수밖에 없다. 엥겔스는 생산수단 독점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아 자본계급과 국가기관의 수탈과 억압을 영속화하려고 했던 국가주의자로 결국에는 국가를 사회 하부의 기구로 만들겠다는 마르크스의 열망을 부정한 것이다. 생산수단 독점을 막고 생산 수단을 공유하면 지주나 자본가도 사라지고 분배의 기구로서 국가도 존재할 이유가 없다. 생산 수단 목적과 아울러 폭력과 정치 수단의 독점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코뮌주의,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마르크스의 인간사회 이념이다.
저자는 “우리 사회가 1980년대 군사 독재 시대에 유입된 마르크스주의가 진정한 마르크스 사상이 아닌 엥겔스-레닌주의, 엥겔스-스탈린주의,엥겔스-마오주의, 엥겔스-김일성주의였으며 이는 소수의 권력을 정당화시킨 왜곡된 마르크스주의를 배웠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엥겔스가 마르크의 사상을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이라고 규정한 이후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사회활동과 무관한 형이상학 논리로 왜곡되었고, 엥겔스를 비롯한 마르크스 추종자들은 결국에는 일반 민중들의 자발성을 부정하는 엘리트주의에 발을 담가 민중들은 소외되고 소수 특권층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비극은 엥겔스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마르크스-엥겔스라는 연결고리를 끊고 마르크스를 마르크스로 다시 읽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1990년대 들어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로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사적 유물론은 더 이상 과학전 진리가 아니라는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 소련이란 국가는 모든 생산수단을 독점해 노동자나 농민들의 노동력과 생산물을 착취했다. 이 모든 억압과 착취 행위를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표방한 코뮌주의에 대한 왜곡이자 사회주의에 대한 모독이다. 마르크스는 명명백백하게 국가주의를 거부하고 과거 소수의 지배계급만이 향유한 대상적 활동을 모든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사회를 지향했다. 소수 지배계급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참여하는 사회가 바로 마르크스가 표명한 인간사회이다.
저자는 “가장 강력했던 인문 정신이자 민주 정신이었던 마르크스를 19세기에 박제된 지성인이 아니라 21세기 현재에도 유효한 강력한 철학자를 입증하기 위해 책을 집필했다”라고 밝힌다.
개인적으로 70ㆍ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사람으로 마르크스에 관한 생각은 매우 이중적이었다. 암울한 시기에 사회 변혁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를 읽어야 했지만, 당시 검열을 피해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마르크스 책들은 너무 생경하고 딱딱해서 읽기에 힘들었고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
그런 나에게 강신주의 『철학 VS 실천』 책은 지금에야 와서야 비로소 마르크스 철학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21세기 들어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체제로 더욱 공공화되어가는 가운데 어느 때보다 물신주의와 배금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상황에서 인간사회의 따뜻한 공동체를 강조하는 마르크스 철학은 여전히 살아있는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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