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이 온다/안젤름 야폐』를 읽고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자본주의 체제를 폐지해야 한다. 안젤름 야페는 『파국이 온다-낭떠러지 끝에 선 자본주의』라는 책에서 어느 좌파 이론가보다 맹렬하게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를 주장한다.
독일 출신 철학자 안젤름 야페는 가치비판론을 근거로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물신주의를 숭배하는 자동기계가 작동하여 삶의 토대를 무너뜨리고 있음을 분석하고 자본주의를 수정 내지 개량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치비판론은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재해석한 이론으로 노동의 교환가치가 화폐로 환산되어 계량화(추상 노동)되면서 자본 축적과 물신 숭배에만 관심을 갖게 되어버린 자본주의의 체제를 예리하게 분석하는 틀이 되었다.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합리성은 추상 노동을 통한 가치 실현에 달려 있으며, 가치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포괄적 종합 원리가 되어 버렸다”고 분석하면서 “이처럼 질보다는 수량을, 내용보다는 형식을 중시하는 가치론은 결국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지배하게 되고 우리 자신을 물신주의 메커니즘에 종속시키고 말았다”고 강조한다.
가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인간의 삶은 뿌리째 흔들리면서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고 있다.
무엇보다 추상 노동을 중심으로 생산이 조직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사회관계가 인간적 자율성이 제거된 채 소외된 방식으로 형성되고 있다. 또한 자본의 가치 증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그 모든 것은 사치 내지 잉여에 불과하며 잉여 자체도 점차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추상 노동의 전면화가 사회적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되었고 노동에 기초한 현재의 상품 물신주의 사회는 결국에는 인류 전체를 잉여로 만들고 있다.
자본 축적 메커니즘은 급기야 예전에 가치 평가를 받을 수 없거나 상품화되지 않았던 영역까지 가치의 영역으로 통합해버려 사회의 내적 식민화를 공공연히 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 상품 사회의 맹목적 물신주의 논리는 비상업적 기준으로 움직이는 다른 사회 활동의 공간마저 소멸로 몰아가고 있다.
오로지 자신을 노동시장에 잘 파는 것이 개인적 삶의 목표가 되어버리고 시장이라는 이름의 신의 은총을 받는 것이 유일한 삶의 목표가 되어 버린 사회로 이행한 결과, 삶의 모든 과정이 경제(가치) 법칙 앞에 무너져 버리고 죽음의 충동만이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저자는 “가치 증식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그 자체가 일종의 과잉 내지 잉여로 보이기 시작하는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면서 사람들은 각자도생의 태도를 강하게 드러내지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야만주의로의 전락과 나선형 추락만이 예상된다”고 단호히 언급한다.
자본주의 위기는 결국에는 인류 전체를 위기의 낭떠러지에 서게 한다.
모든 사회 구성원에 의해 널리 수용된 삶의 방식인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일시적인 분배 형태의 변화나 관리자의 교체는 이제는 의미가 없어짐으로써 이제 우리는 문명의 위기라는 파국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자본주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대대적 구조 개악은 기대하기 어렵고 우리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것은 야만주의로의 전락만이 예상된다”면서 “한꺼번에 대폭락 같은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아래를 향해 치닫는 나선형의 추락이 예상될 뿐”이라고 강조한다.
인류가 처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결국에는 자본주의 체제의 폐기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자본주의를 폐기하는 것은 상품, 물신주의, 가치, 화폐, 시장, 국가, 경쟁, 민족, 가부장주의, 노동 등 자본주의 토대 역할을 해온 이데올로기를 허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자본주의 상품 사회의 품 안에서 이뤄지는 사회화의 결과로 만들어진 주체 형태로는 더 이상 자본주의 저항에 나서기 힘들다는 점을 인식하고 획기적인 인류학적 혁명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학적 혁명이란 인류가 직면한 자본의 범주인 상품·가치·화폐·성장 등에 갇힌 자동 주체의 모습을 극복하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에 진정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롭게 탄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자본주의가 덮어씌운 주체-형태(내면화된 모습)와 진심으로 단절하고자 하는 사람들만이 혁명을 이룰 수 있다“면서 ”지금까지의 사회화 과정에서 배운 경쟁과 같은 부정적인 것을 탈피하고 인간적인 사회를 새롭게 구성하기 위해 서로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자본에 의해 수백 년간 계속된 폭력과 기만을 통해 강제로 주입된 경제적 이익만 추구하는 인간상(호모 에코노미쿠스)에서 탈피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우리의 의식을 고양하는 데 있다.
저자는 자본주의 폐지를 위해 깊게 성찰하고 상호 유대를 주장하지만,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라기보다는 담론을 제시하는 수준에 그쳐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자본주의 폐지를 위해서 이론적 투쟁을 더욱 철저히 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실천적 행위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꾸준히 최적화를 모색해오면서 인간의 내면에 뿌리를 깊게 내린 자본주의 코드를 제거하기에는 너무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축적과 물신주의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은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숭배하게 하는 자동기계 시스템의 작동을 막아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충분히 공감한다.
책은 자본주의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진정으로 조화롭게 살아가려면 근본적으로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제시하고 있어 현행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인간이 직면한 상황을 냉철하게 성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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