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성서/송주성』를 읽고
성경을 인문학적으로 읽어라. 『함께 읽는 성서』라는 책은 맹목적인 성서 읽기를 지양하고 인문학적 사유를 통한 성서 읽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성서를 올바로 읽으려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기독교의 형성과정에 작용한 사유의 체계를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저자는 스피노자·헤겔·니체·하이데거·지젝 등 철학자는 물론 프로이트· 라캉 등 심리학자와 야스퍼스·볼트만 등 신학자들의 이론과 도스토옙스키·프란츠 카프카 등 대작가의 문학작품 내용을 책 곳곳에서 언급한다.
성서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유대교 교리나 기독 교회의 도그마 속에서 뒤섞여 예수의 가르침이 왜곡되어 있는지 일반인은 판단하기 쉽지 않다.
서양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한 유대교와 바울 신학을 비판해왔다.
유대교에서 파문당한 스피노자는 성경이 신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문학 작품이라고 주장한 첫 번째 사람이다. 그는 금서로 찍힌 『신학정치론』에서 창세기는 모든 인류가 아니라 오직 유대 백성의 기원을 다루는 역사이며, 아담의 창조는 첫 번째 유대인의 창조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신이 인간처럼 행동할 것이라는 신인동형론적 교리를 일찍이 배척했다.
헤겔은 젊은 시절 기독교 연구를 통해 기득권에 빠진 교회와 성직자에 대해 비판했지만, 예수에 대해서는 무한한 존경을 표했다. 신이 죽었다고 설파했던 니체도 역시 교회와 성직자들에 대해서 심하게 비판했지만, 예수에 대해서는 무한한 동경을 드러냈다.
저자는 20개의 주제를 통해 성서 속에서 유대교 바울 신학에 의해 예수의 가르침이 어떻게 굴절되어 있는지를 밝혀준다.
특히 구약성서의 교리는 본질적으로 유대교의 교리로 예수의 가르침과 무관하거나 거리가 멀고, 신약성서의 바울 서신은 예수 그리스도교를 유대교로부터 단절시키지 못하고 유대교의 관행과 교리 속으로 되돌려버리는 반 예수 그리스도적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여러 철학자의 사유를 참고하면서 구약 성경을 바탕으로 원죄와 구원만을 강조하는 유대교와 바울 기독교에 대해 예수 입장에서 반론을 제기한다.
유대-기독교는 오랫동안 이 세계가 아담과 이브의 죄로 인해 태초부터 타락과 형벌의 세계로 시작되었다고 교리화함으로써 유대민족의 하비루 의식을 보편적인 것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하비루 의식은 신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추방시키고 인간을 비루한 존재로 영원한 신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유대교와 바울 기독교는 인간들에게 엄청난 죄의식과 공포를 불러일으켜 신을 두려워하면서 믿도록 하고 모든 권력에 순종하라고 강요해왔지만, 예수는 신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로 신과 인간이 어울리는 세상을 추구하는 존재적 혁명을 외쳤다.
예수는 신은 심판자로 우리에게 고난과 형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이자 사랑의 아버지로 함께 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신을 사랑하는 것은 신이 만든 세상의 모든 사람과 우주의 전부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바로 신이 우리 인간에게 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교와 바울은 신을 인간의 죄를 단죄하는 재판관으로 여겼지만, 예수는 신을 공동체의 가부장으로서 아버지라는 존재 개념으로 인간에게 정립하려 했고 모두의 아버지를 모두에게 돌려주고자 노력한 최초의 인간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은 인간성 혹은 인간 존엄성 그 자체로 신은 우리 바깥의 초법적 통치자가 아니라 우리 안의 사랑과 인간성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한다.
진짜 신앙인은 하느님과 자신을 하나의 공동 협력자로 인식하고 자기 존재 안에서 자신과 하느님이 같이 성장하도록 노력하는 사람으로 신을 목소리 높여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적 진실 속에서 인간의 고귀함을 만나고 거기서 신의 위대함을 만나야 한다.
저자는 프로이트 등 심리학자의 이론을 빌어 성령이란 일종의 죽음 충동으로 인간이 존재의 근원적 결여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귀소 본능이라고 소개하면서 예수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은 사라짐이라는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고 우리 역시 그 사라짐에 동참함으로써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예수의 사유 체계는 유대인의 사유 체계와 근본적으로 다르고 서양 철학의 토대인 플라톤식 사유 체계와 분명히 배치된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유대인들의 완고한 유일신 신념을 받아들이지 않고 각자 자기의 신을 믿으라는 입장이었으며, 예수의 정신세계는 유일신을 받드는 유대교보다는 전형적인 다신교 사회였던 그리스-로마 사회와 문화에 더 가까웠다. 예수는 다신교와 민주제를 옹호했던 소크라테스 이전 그리스인의 사유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플라톤 이후 서양의 사유는 평등과 일치의 공동체가 아니라 신-왕-인간을 수직적으로 위계화한 통치국가를 중시함으로써 인간은 낮춰지고 왕과 신은 더 높이 받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인간과 신, 천상과 지상은 점점 멀리 분리되고 말았다. 육체와 정신의 이원화로 신과 인간이 천상과 지상 세계로 분리되고 신은 세상 밖에 초월한 존재로 남게 되었다.
반면 예수의 패러다임은 지상과 천상을 단절적으로 구분하지 않는 연속체로 보며 영혼과 육체에 대한 엄격히 구분하지 않고 신이 인간의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다.
저자는 급기야 성서는 서양의 전통적인 사유 체계인 소크라테스·플라톤·유대교의 패러다임에 맞서 벌인 사상적 투쟁의 기록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은 기존 신학계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겠지만 인문학적으로 성경을 읽자는 것은 맹목적인 믿음 대신 이성을 통해 신앙에 접근하자는 말로 들린다.
사실 오늘날에도 권력화되고 보수화된 대형 교회 성직자들은 성서를 근거로 신자들을 가르치고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인 성서 읽기와 믿음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성서를 통해 강조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으면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인문학적으로 성서를 읽는 것이야말로 성서를 가장 성서답게 읽는 방법이고 이것이야말로 예수를 포위하고 있는 적들로부터 예수와 성서를 구해내야 하는 기독교 신자들의 막중한 책무”라는 저자의 지적이 결코 공허한 말로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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