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의 화가. 겸재 정선(이성현)
몇 년 전에 동대문디자인센터에 겸재진경산수화전을 본 적이 있다. 당시 인왕산과 금강산을 실경과 가깝게 묘사한 정선의 그림에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
이성현 화가가 쓴 『노론의 화가. 겸재 정선』 책 내용은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그림 설명에 있어 자연을 품은 화가의 마음을 풀어썼으리라 예상했지만, 책은 후기 조선 사회를 지배한 노론 강경파의 지원을 받은 정선의 그림이 갖는 정치 사회적 함의를 주로 담고 있다.
겸재는 17세기 중·후반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진경 시문학을 추종하면서 시서와 조화를 이루는 진경산수화를 이뤄냈으며 자연경관을 최대한 사실대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그러나 저자는 인왕제색도·경교명승첩 등 겸재의 진경산수화에서 영조 시대 탕평책으로 권좌에서 밀려난 노론 강경파들의 정치적 견해가 교묘히 스며들었다고 분석한다.
이를테면 <인왕재색도>가 병중의 친구 사천(이병연)의 쾌유를 기원하며 그린 것이라는 일반적 평가와 달리 인왕산 자락에 터를 잡은 노론 강경파 창동 김씨들의 관점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 당시 영조는 돌도 맞지 않은 사도세자의 첫아들을 세손으로 책봉했다. 사도세자와 관계가 안 좋았던 장동 김씨들은 영조가 조만간 인왕산처럼 어진 임금의 모습을 회복하여 자신들이 국정에 참여할 것이라는 희망을 겸재가 담아냈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저자는 또한 인왕산 자락의 계곡을 그린 <청풍계(淸風溪)>도 장동 김씨 가문의 본산을 상징적으로 그린 것이라고 풀이한다.
사천 이병연의 추천으로 장동 김씨 세력들의 든든한 후원을 받고 벼슬길에 올라 평생 화업을 이룬 겸재는 그들이 내세운 정치 이념이나 명분과 연결되어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이다.
저자는 진경산수화에 대한 기존 전문가들의 해석에도 비판을 가한다. 일반적으로 진경산수화란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린 그림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진경산수화는 실경 풍경화와 달리 실제 경치에서 느낀 감흥을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해 화가의 주관적 해석을 통해 재구성해낸 것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전통 산수화는 원래 자연경관을 그려내고자 한 것이 아니고 공간적 개념 속에 화의(畵意)를 담아낼 수 있도록 진화해왔다면서 산수화는 순간의 감응에 반응하는 방식이 아닌 체험의 재구성을 통해 그려낸 것이라 주장한다.
“산수화는 원래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시각적으로 구현해내기 위한 것으로 이를 자연 경을 빌려 표현해내었던 탓에 산수화라는 예술형식이 생겨난 것일 뿐 원래 자연 경이나 자연관을 담아내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산수화는 원래 중국 주역에서 야만족 계도를 위한 교육의 괘라는 산수몽의 어원을 두고 있으며 산수화는 우주의 이치를 자연경관에 빗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담아내는 수단일 뿐이다.”
저자는 자신의 탄탄한 학문 실력을 바탕으로 기존 평론가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내세운다. 대부분 미술사가들이 조선 후기 회화를 민족문화의 고유색과 연결해왔으나 저자는 아직 민족문화의 고유색이라 일컬을 만한 특화된 고유 양식을 분명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겸재라는 걸출한 특정한 화가의 빼어난 표현력은 평가할 수 있지만, 그의 화법이 조선의 고유한 회화 양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는 세상 만물을 보고 표현해내는 새로운 방식이 화가가 직접 창안해낸 조형 어법의 변화에서 비롯된 결과가 아니라 畵意(그림 속에 담아둔 생각이나 뜻)를 전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효과적 표현일지라도 고유 양식이라 할 수 없다”
진경 시대 문예의 특성과 관련하여 저자는 당시 문예인들이 이전 시대와 달리 조선 사회가 직면한 현실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본다면 진경 문화는 그 당시 기득권층인 노론 세력이 떠받들었던 조선중화(朝鮮中華)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선중화사상은 위기에 빠진 조선 성리학을 지켜내기 위하여 숭명배재청(崇明排淸)의 명분론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는 개혁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얽어매고 사대부들의 기득권을 더욱 강화하려는 데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겸재 정선의 가장 큰 후원자가 장동 김씨들이었고 장동 김씨들의 정치적 행보와 부침에 따라 겸재의 이력과 화업의 변화가 함께했음을 수많은 자료가 증거하고 있는 만큼 조선 후기 전경 시대 회화를 주도한 겸재를 노론의 화가로 당연히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겸재 정선이 아무리 빼어난 화가라 하여도 조선 후기 회화의 특성을 그의 작품을 통해 규정하는 것은 폭력과 다름없다.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통해 조선 후기 문화와 시대적 특정을 설명하는 것은 미술사가들의 지나친 욕심이거나 오만이다.”
저자는 “모든 학문은 질문에서 시작되지만, 선입견에 묶여 있으며 질문 자체가 생길 리 없다”면서 “이런 관점에서 한국미술사에 대한 여러분의 선입견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지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보길 바란다”고 독자들에게 당부한다.
책을 읽고 나니 그림 작품을 제대로 감상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냥 남의 평가에 의존해서 그림을 이해하는 것은 쉽게 편견에 빠질 수 있는 길로 이르게 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힘들겠지만 나름대로 공부하고 꾸준히 연구하고 나서야 그림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은 백재선 기자의 블로그(https://blog.naver.com/daul79)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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