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업 인문학』(박민영)
인문학자인 박민영이 쓴 반기업 인문학이라는 책 내용은 독특하다. 사회적으로 기업이나 기업가들이 인문학적 감수성에 빠지는 것에 대해 대체로 반기는 분위기이나 이 책은 오히려 반기를 든 점에서 그렇다.
최근 들어 신자유주의 개념을 담고 있는 경제경영서와 함께 기업 인문서가 시중에 넘쳐나는 추세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대학에서 인문학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에서 인문학이 유행하고 있는 것은 정통 인문학이 아니고 기업 인문학이라고 단호히 말한다.
기업 인문학은 기업 이익과 자기 계발에 복무하기 때문에 정통 인문학과 구분된다. 기업 인문학은 인문학 고유의 특성인 비판의식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판의식을 소거시킴으로써 현실 인식을 왜곡시키거나 마비시킬 수 있다.
저자는 기업들이 인문학 활용을 높이는 배경을 분석하고 기업 인문학의 신화적 인물로 부상한 스티브 잡스에 대해 비판의 칼날을 세운다.
저자는 “기업들이 제품이나 서비스 개발에 인문학을 접목하려고 하는 것은 회사나 제품의 홍보를 위해 인문학으로 포장하는데 불과한 것”이라면서 “스티브 잡스는 자신과 애플 제품을 인문학적으로 잘 포장하면서 대중을 믿음의 영역, 종교의 영역으로 인도하는데 활용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스티브 잡스의 인문학 활용 신화는 인문학을 잘 이용하면 자본가도 존경의 대상, 숭배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지적 권능을 갖고 대중을 지배할 수 있는 단적인 사례에 불과하다"라고 혹평한다.
저자는 기업들과 교류하고 있는 국내 저명한 인문학자들에 대해서도 과감히 비판한다.
저자는 “인문학자들이 기업의 현실적 요구에 타협한다면 인문학 본연의 비판적 성찰적 성격을 상실하여 자기 존재 기반을 허무는 것”이라면서 “인문학자가 진보적이고 사회 민주적 시각을 갖춘 인사라 하더라도 기업들로부터 협찬을 받으면 결국에는 기업을 비판해야 하는 인문학자 본래의 역할을 소홀히 하고 기업에 우호적인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최근 들어 인문학의 콘텐츠화 추세에 대해서도 날쌘 비판을 가한다.
인문학의 콘텐츠화란 인문학의 비판적 기능을 박탈하고 산업화할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하라는 자본의 요구에 불과하고 문화상품의 생산 주체가 인문학자가 아닌 국가나 기업이 된다는 것이 비판의 골자이다.
저자는 인문학적 요소가 가미된 사회교육, 사회적 기업과 사회적 투자에 대해서도 국가와 자본의 논리가 스며들고 있어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은 빈곤과 비인간화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대중의 심리를 역이용해 사회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 흡수하여 정부의 공적 기능을 약화시키는 대신 기업의 사적 이익을 늘려주는 반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서민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복지를 사회투자 개념으로 대체하는 것은 신자유주 체제하에서 필연적인 만성적인 실업, 빈곤, 노동 불안정성과 사회적 불안정성의 확산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세계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는 자본주의 4.0 체제 구축과 제4차 산업혁명 트렌드에 대해서도 경계의 눈길을 보낸다.
자본주의 4.0 체제 구축은 신자유주의 쇠퇴를 막기 위한 자본주의의 새로운 말 바꾸기에 불과하고 제4차 산업혁명은 과학기술의 외피를 쓴 정치적 담론일 뿐 실질적인 진전은 없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저자는 기업들이 제4차 산업혁명을 내세우고 정치적 담론을 주도하면서 규제 철폐를 통해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려 하는데 오히려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4차 산업혁명의 전개로 일터를 잃은 노동자들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한다는 일부 진보 진영의 목소리에 대해서는 이는 기업들에 주도권을 손에 쥐게 하면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더욱 약화하는 효과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반대 입장을 표명한다.
저자는 오늘날 자본주의 총아로 꼽히고 있는 기업 법인 체제가 궁극적으로 사회적 재앙이 될 수 있다면서 법인의 권한을 해체하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기업 법인이 법적인 차원에서 인간 이상으로 온갖 권리와 자유를 누리면서 무한대로 몸집을 키우고 여러 지역에 동시다발로 존재할 수 있게 되어 인간이 기업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권력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에 이르게 됐다.
실제로 기업은 인간 생명과 자유와 평등을 박탈하는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어 민주주의 보장과 인권 보호를 위해서는 기업의 법인격은 반드시 해체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지론이다.
저자의 비판은 독창적이고 참신하다.
대학에서 인문학은 고사 지경이지만 기업이나 사회에서는 인문학 열기가 과도하게 높은 이상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인문학자들은 대학에서 시들어가는 인문학을 사회나 기업에서 살려야 하겠다는 의욕을 가질 수 있으나 인문학의 기본적인 가치인 개인적 성찰과 비판 정신을 망각하지 않는지 늘 되돌아봐야 한다. 인문학이 기업 경영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만 역할을 한다면 인문학은 경영학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저자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보면 사회적으로 뜨거운 인문학 열기 속에서 자본가나 권력자가 자신들의 이익과 이해를 감추고 대중을 지배하려는 목적으로 인문학을 활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지 항상 예의주시해야 한다.
인간이 갈수록 파편화되어가는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상황에서 개인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키워나가는 인문학의 정신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기업 인문학에 대한 저자의 통렬한 비판에 충분히 수긍이 가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 제시가 없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저자는 특히 진보 진영에서 제시하는 여러 가지 사회 경제주의 개념과 틀에 대해서까지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안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더욱 자아내게 한다.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깊숙이 뿌리를 내려 살고 있는 현실에서 모든 것을 부정하기보다는 실현 가능한 대안들을 꾸준히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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