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 만나다(김형진)
저자가 오래전부터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읽어오면서 그의 사상과 철학을 분석하며 정리한 글들이라 단순한 비평이나 평전보다 훨씬 심층적이고 다면적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과 철학은 그의 여러 소설에서 단편적으로 드러나지만 저자는 이러한 파편들을 모두 모아 자신의 생각을 보태 그의 생각을 나름대로 집대성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글은 방대한데다 사변적이라 일반 독자들에게 어렵게 여겨지지만, 저자는 그의 소설을 낱낱이 헤아려 음미하면서 글 속에서 담긴 사상의 편린을 끌어모았다.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을 그냥 정리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동안 공부해온 동서양 철학자들과 비교하여 오늘의 시점에서 그의 사상과 철학이 갖는 의미를 독자들에게 제시했다.
실제 저자는 책 머리말에서“도스토예프스키는 과거의 작가가 아니라 현재의 작가”라고 언급하면서“그가 제기하는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현대의 시각과 입장에서 대답을 찾아갈 것을” 독자에게 요구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에서 인간과 신, 선과 악, 이성과 욕망, 죄와 벌, 도덕과 양심 등 인간사와 관련된 주요 테마를 다루었으며 주제에 맞게 여러 유형의 인물을 상징적으로 창조했다.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주인공 중 스비드리가이로프를 악함과 강함의 인물로, 므이쉬낀과 알료샤를 아름다운 영혼의 인물로, 대 심문관을 자유와 강자의 대변자로,조시마 장로를 사랑과 인격의 완성체로 각각 분류하고 글의 실마리를 찾아 썼다. 저자는 도스 소설 속 주인공들의 개성과 지향점이 각기 다르지만, 인간의 구원, 말하자면 지상에서의 삶의 의미와 그에 대한 신의 역할, 인간과 신의 관계에 있어 공통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저자가 지면을 가장 많이 할애한 인물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편에서 나오는 대심문관과 조시마 장로이다. 이들 인물은 도스토예프스키가 평생에 걸쳐 탐구해왔던‘이성과 자유’, ‘신과 인간’, ‘사랑과 구원’이라는 영원한 테마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저자는“현대적 의미의 자유가 태동하는 시대에 도스토예프스키는 누구보다 앞서 자유의 의미와 한계에 대해 고민했던 작가”라고 단언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유를 신의 속성에서 인간의 속성으로 내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자유는 그냥 주어진 선물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조건이자 목표였다”고 강조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자유에 관한 생각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곳이 대심문관이 재림한 그리스도와 만난 장면이다. 대심문관은 그리스도에게 도대체 강한 몇 사람에게만 걸맞은 신앙, 고통 없이 도달할 수 없는 자유가 단지 빵만을 원하는 凡人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를 따졌다. 대심문관이 그리스도에게 묻는 과정에서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했지만, 자유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강한 자의 자유와 그렇지 못한 약한 자의 자유가 구분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저자는“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의 등급 문제에 직접 관찰자를 들이댐으로써 어느 철학자도 제시할 수 없는 자유의 차등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다”고 평가한다. 대심문관이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 다수의 약자에게 식량과 질서를 보장하는 대신 끝없는 굴종과 봉사만을 요구하는 것에 맞서 인간이 욕망에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지배하고 갈무리하는 강한 자가 됨으로써 한 차원 높은 자유의 개념을 꽃피워 낼 수 있을 것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기대했다.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같은 기대에 더 나아가“진정한 신앙은 자발적 선택에 터전을 둔 자유로운 신앙에 기반을 두고 있고 참된 자유는 욕망을 자제하고 주체로서 판단과 책임을 다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진정한 강자의 자세에 대해“자유는 책임임을 통감하고 나 자신을 사랑하듯 네 이웃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영혼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소설에서 여러 유형의 극단적인 인물을 창조했지만, 평생에 걸쳐 인간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려 했고 아름다움만이 인생을 구원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을 위해 이 세상에 왔고 인간을 위해 죽어간 그리스도만이 지상에서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유일한 인간이라고 평가하면서 그리스도의 자연성과 완결성을 닮은 인물들을 소설 속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이와 관련해“도스토예프스키는 연민, 보편적 용서, 사랑, 겸손, 지혜 이런 것들을 그리스도의 특질로 생각했고 아름다운 인간을 통하여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화해와 치유의 힘을 보여 주는 그리스도적 사랑을 묘사하려고 했던 것이 그의 창작 의도였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소설 인물 중에서 조시마 장로의 삶을 희생과 봉사, 겸허와 헌신의 표본으로 묘사하면서 가장 높은 수준의 정신적 조화를 체득한 사람으로 드러나게 했다. 조시마 장로는 신이 부여한 자유를 이용하여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아름다운 인격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조시마 장로를 통해 사랑은 쉽게 자연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각고의 노력과 의식적인 단련 끝에 어렵게 얻어지는 정신적 경지라는 사실을 설파했다. 타인에 대한 사랑은 끈질긴 성찰과 노력 끝에 얻어지는 정신적 경지로서 타인에 대한 죄인 의식 혹은 연대 의식의 산물이라는 것을 드러나게 했다.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이 같은 통찰에 대해 크게 공감하면서“조시마 장로가 죄의 인정을 통해 타인과 연대하고 사랑의 추상 개념에서 구체적 실천으로 들어가는 길을 보여 준 것”이라고 자평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 자유와 선악에 대한 고찰을 누구보다도 중요시하고 높은 통찰력을 지녔던 만큼 저자도 동서양철학에서 다루어왔던 자유와 윤리 도덕에 관해 깊이 탐구하고 자신의 논리를 정립한다.
저자는 인간이 선악을 주체적으로 판단해야 할 양심과 도덕 문제에 대해 칸트와 헤겔의 이성과 자유의지론, 노직과 롤스의 정의론, 동양의 공맹 철학과 성리학을 쭉 흩어보고 우리 사회와 공동체 운영에 필요한 상호인정 논리를 제시한다. 저자는“개인의 정체성은 타인을 자신과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고, 타인으로부터 동등한 주체로 인정받는 상호과정을 통해 형성된다.”고 밝히면서 공공양심이라는 상호인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상호인정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객관을 지향하고 합리성을 주입시켜 행위의 가치에 관한 판단의 예측 가능성을 높임으로써 사회를 지속시키고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 기제라는 것이다. 상호인정은 결국 공동체의 유지와 존속이라는 대의명분에 공감하는 동지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 구성원 간의 근본적 믿음의 실행 및 확인 절차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의미에서“상호인정은 고정되거나 얽매이지 않고 역사와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이성”이라고 밝히면서 절대적인 윤리와 도덕론을 주장하는 기존의 철학자들에게 비판의 시각을 드러낸다. 저자는“특히 주자학은 절대적 윤리를 지향했으나 길을 잃고 절대적 혼돈으로 추락했다”면서“형식적으로 절대적 도덕인 理를 찾아냈으나 내용상으로 아무것도 말해주는 바가 없는 공허한 무로 끝나고 말았다”고 통렬히 비판한다.
저자는 책의 결론에서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상에서 인간이 헤쳐나갈 유일한 대안은 자유라고 설파하며 글을 마친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 이외에 풀 수 있는 주체가 없다. 여기 지금에 의미를 부여한 것은 나의 의지, 결심, 행동이다. 내가 동료인 타인들과 함께 지상을 살만한 곳으로 바꿀 수 있느냐는 나의 선택, 결국 나의 자유에 달려 있다. 나는 자유인으로서 나의 자유를 사랑한다.”
이 책을 읽을수록 우리 삶의 근원적인 문제와 의미를 탐구하는데 스스로 빠져들게 하여 반복적으로 책을 읽게 만드는 절묘한 매력을 선사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인간사의 영원한 탐구 주제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 읽기를 적극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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