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평전을 읽고
보수수구 정권의 부상에는 이명박 정부 시절 종편 방송이 허용된 데 크게 이바지했다고 생각한다. 조선 TV를 위시한 종편 방송과 조‧중‧동 보수 신문은 언제부터인가 정치를 보수수구 판으로 바꾸는데 데 앞장서 왔다. 소위 정치분석가라고 하는 지식인 방송인들과 신문논설가들은 국정 개혁 과제 실행과 미래 비전 수립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국민을 좌파 우파로 분열시키면서 결국 시대정신과 거리가 먼 작자를 선출하게 했다.
군부 독재에 기생해온 이들 언론사는 민주화 이후 아무런 반성과 통제 없이 중도좌파 정부를 맹렬하게 비판해왔다. 민주화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재벌 보수언론들은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 그리고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민주 정부에 대해 철저하게 이념의 잣대를 대면서 남북 분단 체제에 따른 반공 보수 이념 수호와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에 안간힘을 써왔다.
이들 언론은 민주 정부의 정책 시행에 따른 이념적 성향과 그로 인해 빚어진 사소한 실책들을 사사건건 책잡으면서 무력화시켜왔다. 신자유체제 이후 소득 불평등에 따른 빈부격차와 세대 간 대립으로 우리 사회 갈등이 심화되고 있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간 긴장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어 어느 때보다 통합과 평화의 노력이 시급한 상황에서 극우 보수 세력의 집권은 앞날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우울한 전망을 뒤로하고 우리 사회의 참 언론인 리영희 선생의 책들을 챙겨봤다. 다시 어둠이 짙어가고 지식인들의 곡필‧어용이 다시 날뛰려고 하는 시대에 참 언론인으로서 리영희 선생의 치열했던 삶을 성찰하고 싶었다.
리영희 선생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평화적‧자주적 통일에의 길에서 조선일보를 필두로 하는 체제파 신문들이 군부나 극우집단보다 더 나쁜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수구 보수언론의 맹목적 반공 논리와 사대주의, 권력 추종과 기회주의 속성에 가차 없이 비판했다.
그는 “자신이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 그친다”고 밝혔듯이 그가 평생에 걸쳐 실천한 것은 ‘진실의 추구’였으며, 그에게 진실의 추구는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였다.
리영희 선생의 삶에 관한 책으로 자서전 성장 스토리인 『역정:나의 청년 시대』 자전적 대담집인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과 각계 인사들과 후학들이 리선생을 기리며 평가한 『리영희를 함께 읽다』와 『리영희 프리즘』을 오래전에 읽었다.
이번에는 김삼웅과 권태선이 저술한 『리영희 평전』을 함께 읽었다. 두 평전은 시대의 은사라 불리는 리선생의 일대기를 격동기의 우리 현대사 속에서 그대로 펼쳐놓는다. 리선생의 삶이 투명하고 명징한 것처럼 두 평전의 일대기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리영희 선생은 1922년 평북 운산에서 태어나 경성공립공업학교와 국립해양대학을 졸업한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육군 통역장교로 입대하고 1957년 예편한다.
1957년 합동통신에서 기자로 생활을 시작한 이후 1964년 조선일보로 옮겨 몇 차례 필화 사건에 얽혀 1969년 조선일보에서 정권과 사주의 압력을 받아 퇴사한다. 조선일보는 당시 코리아나호텔을 짓기 위해 정부로부터 상업차관을 받기 위해 리기자를 내쳤다고 한다. (강준만 추정)
1970년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복직했으나 1971년 군부 독재 학원 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으로 강제 해직당한다. 1976년 한양대학교 신방과 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임 중 정부의 일방적인 교수임용제 시행에 따라 학교에서 강제 해임당한다.
1980년 서울의 봄 상황에서 사면 복권되어 한양대 교수로 복직되었으나 광주 소요 배후 조종자라는 날조된 혐의로 구속되면서 한양대에서 다시 해직당한다. 1984년 다시 복직되어 1995년 정년퇴임 후 1999년까지 같은 대학 언론정보대학원 대우교수로 재임한다. 2010년 지병 약화로 82세의 나이에 삶을 마친다.
리영희 선생은 여러 차례 필화 사건과 시국 사건에 얽혀 걸쳐 수인 생활을 했다. 그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극악한 군사독재 체제하에서 7번이나 강제 연행돼 5번 투옥되었다. 총 1,012일의 감옥생활을 하고, 언론계와 학계에서 각각 2번씩 4차례나 해직되는 굴곡진 삶을 살았다.
김삼웅이 리선생이 작고하기 직전 2010년 펴낸 평전은 그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와 함께 여러 자료와 사진들을 중간중간 삽입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김삼웅은 평전에서 “리영희는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에 맞추지도 않고, 어떤 유혹과 탄압에도 흔들리거나 짓밟히지 않겠다는 의지와 자기 삶의 원칙대로 살아왔다”면서“불의만 있고 공분이 사라진 시대에 리영희 선생의 존재는 불의를 날카롭게 투시하는 명징한 이성과 그 실천성에서 찾을 수 있다”고 기술한다.
또한 “그는 광신적 반공주의와 시대착오적 냉전 사상을 비판하면서 분단체제에서 기득권을 영구화하려는 무리의 허위의식을 벗기고 그들을 상대로 간단없는 싸움을 벌여왔다”면서“그의 글은 여전히 현재성이 되고 그의 뜨거운 사회의식과 역사 인식은 이어져야 할 이 시대의 가치이고 정신적 학문적 자산”이라고 강조한다.
김삼웅은 “이명박 정권 초기 갈수록 역사에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시기에 리영희 선생의 치열했던 생애와 실천을 돌이켜보는 것이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 평전 집필에 나섰다”고 밝힌다.
권태선은 2020년 리영희 선생 작고 10주기를 맞아 선생의 가족과 지인들의 인터뷰 내용을 포함해 리영희의 인간적인 모습을 부각한다.
권태선은 평전에서 “그는 천진함과 따뜻함을 바탕에 두고 끊임없이 성찰하며 새로운 지경을 열어간, 결코 어디에도 정박하지 않는 자유로운 경계인이었으며 자유에 따른 책임을 다하고자 자신의 앎을 삶 속에서 실천해낸 지성인이었다”고 기술한다.
또한 “그는 자신을 단순 기능적 전문가로서의 지식인이 아니라 시대의 고민을 자신의 고민으로 일체화시키는 지성인으로 자임했을 뿐만 아니라 자유인으로 자신과 사회에 대해 늘 책임을 느꼈다”면서 “그러한 이념 때문에 눈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상황과의 관계 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라고 언급한다.
권태선은 “그가 일생을 통해 추구해온 자유롭고 평화로운 인간적 사회라는 요원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시대의 한계에 정면으로 맞서며 분투했던 그의 삶과 그런 삶에서 빚어진 그의 책들이 그의 소망대로 더 이상 읽히지 않고 그마저 잊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는 다시 리영희를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권태선은 “사상의 은사니, 의식화의 원흉이니 하는 이념적으로 규정된 상투적인 이미지 너머의 천진난만하고 다정다감했던 인간 리영희를 찾아 전해주고 싶었다”면서 “끊임없이 경쟁에 내몰리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달리고 있는 젊은이들이 잠시 멈춰 한 시대를 분투하며 살아온 선생의 삶 속에서 오늘을 살아낼 지혜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면서 젊은이들에게 평전 읽기를 권유한다.
리선생은 언론계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이후 정직하고 소신 있는 기사를 쓰면서 군부 독재 정권에 눈이 나면서 구속과 해직을 되풀이하는 수난의 삶을 살았다.
그는 신문기자이든 대학교수이든 철저한 자료 연구를 바탕으로 정확하고 올바른 글을 써왔다. 그는 정권으로부터 몇 차례 회유를 받기도 했지만 자기 소신과 양심에 따라 글을 쓰고 불의한 권력에 맞서 직접 싸우는 실천하는 지성인이었다.
리선생의 이러한 초연함은 저자들의 지적대로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으로 지연이나 학연에서 벗어날 수 있어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사실 우리 사회의 상층부에 속하는 언론계에서 지연과 학연을 바탕으로 정권과 기업에 연줄이 닿는 사람이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다. 그러나 리선생은 오로지 자신의 실력과 소신에 따라 거침없이 글을 쓰고 실천해온 선비적인 지식인이었다.
리선생의 삶에 가장 눈여겨봐야 할 점은 지성인으로 시대정신과 함께 해왔다는 점이다. 모두가 남북 분단으로 인해 반공주의와 대미 사대주의에 빠져 있을 때 이에 기생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주류인 극우 보수 반공주의자들을 자들을 깨우치려 했다. 리영희는 유신 말기 필화 사건으로 반공법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을 때 스스로 상고이유서 작성을 통해 인식 정지증에 걸린 대한민국 사법계를 비롯한 주류사회를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리영희 선생은 중국의 대작가 루쉰을 평소 존경했지만, 그의 삶은 루쉰의 삶과 비견할만하다. 두 사람은 중국인과 한국인들의 ‘자기 기만적 허위의식’을 폭로하고 그들의 주체적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진정한 지식인이란 사회에 대해 영원히 만족하지 못하는 영원한 비판자로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희생을 감수하며 민중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려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일맥상통한다.
개인적으로 리영희 선생에게 배워야 할 점은 매사에 직업인으로서 철저함을 추구하는 데 있다. 그는 책상머리에서 2, 3차 자료를 편집하는 차원이 아닌 1차 자료와 증언‧기록 등을 광범위하게 모으고 직접 해독하여 독보적인 텍스트를 생산했다. 치밀한 논증을 통해 글의 생명력과 신선도를 지켜나갔으며, 집필한 뒤에도 검증과 퇴고, 교열, 독자 반응에 이르기까지 자기 글에 대한 철저한 책임을 끝까지 고수했다고 한다.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신 지 10년이 지났지만, 우리 언론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리선생이 활동한 시기에는 많은 언론인이 언론사 민주화와 족벌언론 타파를 위해 싸우다가 직장에서 쫓겨 나가기도 했지만, 작금의 기자들은 재벌 언론이 제공해 준 당근에 안주하면서 독자들이 아닌 언론 사주들과 이해를 같이 하고 있다.
양심과 진실 수호자라는 언론인의 시대정신은 사라진 지 오래고 곡학아세(曲學阿世)와 침소봉대(針小棒大)만 난문하고 있는 곳이 지금의 언론계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더욱이 개인 채널이 넘쳐나고 있는 작금에 신문과 방송이 중심을 잡고 역할을 다해야 하지만 오히려 돈벌이를 위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를 남발하면서 페이지 뷰 경쟁에 나서고 있는 것은 꼴불견이다.
솔직히 말하면 운동권이 아닌 나는 대학 시절에 리영희 선생의 글은 별로 읽지 못했다. 80년대 후반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잡지와 신문 기사를 통해 리선생의 글을 접했다. 특히 80년대 말 해직 기자들이 결성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에서 발행한 『말』지를 통해 접한 리선생의 글은 언론들이 다루지 못한 궁금증을 해소시켜주었다. 1988년도 한겨레신문 창간 이후 실린 그의 사설은 당시 집권자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함께 국내외 정세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그러한 선생을 보고 보수수구세력들은 의식화의 원흉이라고 들먹거렸지만 사실 리선생의 불편부당(不偏不黨) 한 시각과 진실과 양심에 대한 호소는 지금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왜냐하면 현재 주류로 자처하고 있는 보수수구언론이 여전히 거짓을 호도하고 부정에 가담하면서 시청자나 독자들의 판단과 양심을 흐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지하에 계신 리영희 선생은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평가할까. 리선생은 돌아가시기 전 병고의 몸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이 역사의 퇴행과 권력의 만행이 이어지자 파쇼체제라고 비판했다. 선생의 이러한 준엄한 질타가 다시 이어지지 않을까 두렵기만 하다.
“이명박 통치 시대는 비인간적‧물질주의적‧반인권적 파시즘 시대의 초기에 들어섰다. ‧‧‧현재 이명박 정권의 물질밖에 모르는 인간이 지양하고 숭배해야 할 가치를 오로지 돈에만 두는, 그리고 인간의 존재가치가 말살되어가는 이런 정권을 과거 40년의 고생 끝에 받아들인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가 공민으로서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필사적인 불퇴전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2009년 7월 1일, 인권실천시민연대 창립 10주년 기념행사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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