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일기/정문태』를 읽고
저자는 오랫동안 외신기자로 인도차이나 지역 혁명사와 정치 변혁사를 몸소 취재하고 기사를 써왔다. 저자는 이번에 취재 대신 여행을 목적으로 국경 지역을 다시 찾았지만, 그의 관심사는 과거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잃어버린 역사 찾기에 나섰다.
먼저 찾은 곳은 타이 북부지역 치앙마이가 가까운 국경 지역이다. 치앙마이는 일반인들에게 타이 북부지역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알려져 있지만, 저자에게는 마약 전선의 거점으로 기억된다.
저자가 다시 방문한 타이 북부 국경 마을 탐응읍은 한때 마약으로 엄청난 돈이 들어오고 나갔던 비밀의 무대였다. 이곳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 타이완‧중국‧타이‧버마가 마약 판매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전쟁을 벌였던 현장이다.
책에서 특이하게 읽은 점은 마오쩌둥에 의해 중국 본토에서 타이완으로 쫓겨난 장제스가 이곳으로 탈출한 국민당 잔당을 본토 수복을 내세워 배후에서 지원했다는 것이다. 미국도 동남아시아 공산주의 확장에 놀라 버마 국경을 넘어온 국민당 잔당을 지원하면서 국민당 잔당 지도부는 CIA의 비호 아래 아편을 팔아 군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개인적인 부를 쌓아갔다. 특히 CIA는 버마 국경에서 국민당 잔당이 생산한 아편을 비밀스레 에어 아메리카 항공편으로 치앙마이를 걸쳐 방콕까지 실어주면서 전비를 챙겼다.
CIA 지원을 받은 국민당 잔당은 1951~1952년 당시 7차례에 걸쳐 중국 윈난을 공격해 한국전쟁 제 2전선을 펼치기도 했다. 미국은 국민당 잔당의 덩치만 키운 결과 인도차이나 지역 안보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국제 마약 시장의 폭발적 팽창이라는 부메랑을 맞게 되었다.
저자가 다시 찾은 반힌땍도 1970년대 연간 1천톤을 웃도는 아편을 생산한 버마-타이-라오스 국경을 낀 이른바 골든트라이앵글의 심장이었다. 버마-타이 국경에는 국민당 잔당이 반공을, 마약 군벌은 민족해방을 슬로건으로 삼아 활약했던 지역이다. 두메산골 반힌땍은 민족해방전선으로 포장한 국제마약꾼들의 치열한 전선이었다.
아편 왕 쿤사는 이곳에 샨연합군 본부를 차려 마약 생산과 루트를 손에 쥐었다. 19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나자 미국 정부는 쿤사를 공적 범죄자로 지명수배했으나 쿤사는 버마 군사정부의 도움으로 기소되지 않고 2007년 여생을 마쳤다.
저자는 국경 지역에 살고 있는 여러 소수민족 마을들을 찾으면서 이들의 비애를 전해준다.
타이-버마 도이앙캉 국경 지역에는 버마 정부에 맞서 민족해방을 외쳐온 따앙족이 살고 있다. 따앙족 사람들은 국경선과 군사기지 사이에 끼여 오도 가도 못한 신세에 처해있다. 이들은 국경에 볼모로 잡힌 채 태생적 권리인 여행과 이전의 자유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저자는 마을 사람들의 생존권마저 짓밟는 국경선이야말로 인류 최악의 발품이라고 분개한다.
타이 반파노이 마을에서는 사는 아카족도 소수민족의 비애를 겪고 있다. 타이 소수민족 중 고집스레 전통을 지켜온 아카족은 아카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조상과 정령을 함께 모셔왔지만 이제 반도 넘는 이들이 미국 기독교 감리교회나 가톨릭으로 갈아탔다. 불교국가인 타이는 그동안 종교자유를 내걸고 기독교 선교에 눈감아 주면서 아카족을 외면해온 결과, 반파노이 마을에 사는 주민 절반이 시민증도 없이 정체불명 외계인으로 살고 있다.
몽족이 사는 반촘푸는 이념 때문에 타이 현대사에서 사라져버린 마을이다. 타이 정부는 1970년대 빈곤과 불평등 문제로 반정부 기운이 드센 이 지역에서 공산당 타도를 내세우며 군을 동원하여 몽족 토벌화에 나섰다. 타이 정부는 1960년대 중반부터 미국 지원을 업고 공산당 박멸 작전을 벌여나갔으며, 타이 공산당은 동북부 지역 농민과 북부지역 몽족을 주력 삼아 타이 정부의 무력 강공책에 맞섰다. 몽족은 정치적 신념보다 생존 때문에 타이 공산당을 선택했지만 타이 공산당은 지도부의 분열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1986년 해체되어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
이에 대해 저자는 “세계혁명사는 엘리트 지도부만 있을 뿐 민중이 없다”면서 “혁명의 꿈을 안고 험한 산악전선에 기꺼이 청춘을 바쳤던 몽족 사람들이 아직도 타이 사회 곳곳에 박혀 소리 없는 파수꾼 노릇을 하는데 역사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저자는 형제 국가인 타이-라오스가 전쟁을 벌였던 롬끌라오 지역을 다시 찾았다.
타이와 라오스는 이곳에서 1987년 12월부터 1988년 2월까지 정부군을 동원해 전쟁을 벌였다. 두 정부는 1,000여 명의 전사자가 나오자 국경 지역에 비무장 지대 설치에 합의했으나 두 나라 나이 땅은 영토주권 분쟁지역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저자는 버마 군사정부와 소수 민족해방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까레나 지역도 방문했다.
1947년 영국 식민 통치 시기 창설한 까렌민족연합은 군사 조직인 까렌민족해방군을 이끌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장기 무장 해방 투쟁을 벌여왔다. 버마는 1948년 영국 식민주의에서 독립했지만 쿠데타로 등장한 군부 독재 정권은 독립 당시 약속한 소수민족의 자치와 자결 보장을 깨뜨리고 까렌족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을 지금까지 탄압해오고 있다.
저자는 타이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 내전 현장인 초암사응암을 다시 찾았다. 시골 골짜기인 초암사응암에는 카지노가 들어서 있으나 1998년 캄보디아 내전 당시 크메르루주의 지도부가 거주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베트남은 1978년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행 삼린을 내세워 괴뢰정부를 수립한다. 크메르루주는 오랜 기간 대베트남 항전을 벌였고 베트남은 1989년 캄보디아에서 물러났다. 크메르루주는 베트남이 심어놓고 간 훈 센 총리 정부에 맞서 싸웠으나 1990년대 들어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 개선으로 미국‧중국‧타이가 지원을 중단하자 급격히 쇠퇴하고 말았다.
킬링필드의 주역인 크메르루주가 200만을 학살했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베트남 정부에 이어 미국 정부에 의해 지나치게 부풀려진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실제 미국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공을 박멸하겠다면 선전포고도 없이 중립국인 캄보디아를 폭격해 숱한 인민을 학살했다. 1975년 캄보디아를 해방한 크메르루주는 1979년까지 미국 괴뢰정부 부역자를 숙청하면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크메르루주가 벌인 제 2기 킬링필드에서 사망한 사람은 80~120만 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저자는 “미군이 저지른 인민 학살 책임까지 모두 크메르루주한테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 없다”라면서 “킬링필드를 반드시 두 시기로 나눠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타이와 캄보디아도 쁘레아위히어의 영토주권을 놓고 오랫동안 국경에서 충돌했다. 두 나라 정부는 민족주의를 앞세워 쁘라삿쁘레아위히어를 제물로 삼아 국경 긴장을 불러일으켜 정치적 연장으로 활용해왔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나라가 근대 민족국가와 식민주의가 낳은 패악으로 국경 영토주권 문제로 분쟁을 겪어 왔다”면서 “이제라도 편협한 민족주의와 이기적인 국가주의를 걷어내고 평화공존철학을 가르쳐 영토 분쟁을 끝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종군일기』를 읽다 보니 동남아 인도차이나 국가 간 민족 간에 얽힌 분쟁 역사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특히 역사책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 소수민족의 슬픈 역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동남아 국가들을 관광 목적으로 주로 여행하고 있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과 민초들의 애환도 헤아려 본다면 더욱 의미 있는 여행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런 측면에서 국경일기는 여행기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차이나반도 국가 역사에 관심을 갖는 독자에게 더욱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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