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원 삼대(황석영)
철도원 삼대(황석영)
오랜만에 장편 소설을 읽었다, 황석영 작가의 『철도원 삼대』는 소설이지만 마치 역사 현장 르포를 읽는 것처럼 생생하다.
작가가 1999년 방북 때 만난 서울 출신 전국노동조합쟁의회 소속 철도 기관사의 인생 이야기를 테마로 삼았다. 테마 구상부터 집필까지 무려 30년이 걸린 만큼 작가는 한반도 100년을 꿰뚫는 서사를 소설에 꽉 차게 담았다.
소설은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실감 나고 박진감 있게 전개된다. 일제 강점기 철도반원의 증손자인 공장노동자 이진오는 50대 초반에 해고 노동자가 되어 굴뚝에 올라 복직 투쟁에 나서면서 철도원 출신의 증조할아버지·할아버지·아버지를 회고한다.
증조할아버지(이백만)는 영등포에서 살면서 철도국 선반 기술자로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후손들은 산업노동자로 파란만장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이백만의 큰아들(일철)은 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총독부의 철도종사원양성소를 마치고 화물차 화부부터 시작해 정식으로 기관사가 되어 조선은 물론 멀리 만주까지 열차를 운전하면서 철도노동자로 충실한 삶을 산다.
작은 아들(이철)은 보통 학교를 나와 공장노동자로 일하다가 사회주의 계열 노동운동가를 만나 현장 운동가로 활동한다. 이철은 결국 일제 경찰에 잡혀 수형 생활을 하다가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고 만다.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큰아들의 삶도 달라진다. 일철은 죽은 동생의 죽음에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전평 소속 영등포 철도공작창 노조 지부장이 되면서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의 중앙위원을 맡게 된다.
해방 이후 노조 활동은 대부분 좌익계열 인사들에 의해 주도되면서 일철도 우익 세력과 미군정으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된다. 결국에는 일제에 부역한 친일 경찰들과 우익 청년단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 가족을 남에 두고 혼자 북으로 간다.
일철의 아들(이지산)은 평생 꿈이었던 철도운수학교 편입이 아버지의 월북 이후 신원조회 때문에 좌절되자 영등포 민청조직에 참여한다. 친구들과 동맹파업을 벌이다가 경철과 청년단원들에 의해 쫓기자 아버지 일철을 찾아 북으로 가게 된다.
지산은 북에서 철도원양성학교 교장을 맡고 있는 아버지를 만나 기관차기사 양성교육을 받고 화물차 기관사가 된다. 6.25 전쟁이 터지자 지산은 기관사로 승급되어 남한에서 보급열차를 운행하다가 미군 전투기의 폭격을 당해 다리를 잃고 만다. 포로수용소에 갇힌 신세가 되었으나 종전 직전 이승만의 포로 석방 조치로 북으로 가지 않고 고향인 서울 영등포로 돌아오게 된다.
삼대에 걸친 철도원 이야기 속에 작가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일제 강점기의 노동 운동과 코뮤니스트 활동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사회주의 계열 노동운동자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하려고 래퍼를 통해 비밀스럽게 접선하는 방법과 조선인 부역자들을 앞세운 일제 경찰이 이들을 쫓는 긴박한 순간들이 소설 속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동안 도시빈민 일용 노동자의 삶을 다룬 단편 소설은 나와 있지만, 근대 산업노동자의 삶을 반영한 장편 소설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에서 『철도원 삼대』는 획기적인 작품임이 틀림없다. 이에 대해 작가는 "식민지 시대 이후 조선의 항일노동운동은 사회주의가 기본 이념의 출발점이었다“면서 “해방 이후 분단되면서 생존권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빨갱이로 매도당했지만 남한 민중이 근대화의 주체가 되어 산업화를 이루고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통성을 갖추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작가는 기존 사료를 활용해 일제의 조선인 사상범과 노동운동자들에 대한 악랄한 탄압은 물론 조선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차별 사례를 소설 구석구석에 담았다. 소설 속에서 생생히 드러난 일제의 만행은 민족을 떠나 인권 차원에서도 강력히 비난받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 일각에서 반일종족주의 운운하면서 친일을 우상시하는 세력이 있어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 이후 미군정체제 하에서 친일파의 득세와 좌익과 우익의 극심한 갈등은 지난해에 읽었던 김기협의 『해방일기』를 통해 익히 알았지만, 소설을 읽다 보니 당시 상황이 더욱 실감 나게 느껴졌다.
소설 속에서 1년여 굴뚝에서 농성 중인 이진오의 일상과 동료 해고 노동자들의 분투하는 모습은 지금 이 시각에도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고 있다.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일방적으로 해고당하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한반도에서 지난 백여 년 동안 살아온 노동자의 계급의식은 감춰지거나 사라졌지만, 신자유주의 체계하에서 그들의 삶의 조건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급변하는 시대에 신산한 삶을 살아온 노동자와 민중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후기에서 이렇게 밝힌다.
“이 소설은 유년기의 추억이 깃든 내 고향의 이야기이며 동시대 노동자들의 이야기이도 하다. 소설에 나온 노동현장 활동가들은 모두 자기에게 주어진 작은 역할을 심신을 바쳐 수행했던 이름 없는 노동자들이었다. 나는 이 소설을 한국문학의 빈 부분에 채워놓으면서 한국 노동자들에 헌정하려 한다, 우리 문학사에서 빠진 산업노동자를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근현대 백여 년에 걸친 삶의 노정을 거쳐 한국 노동자들의 삶의 뿌리를 드러내기 위해 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북으로 간 남한출신 철도원 이야기는 인민군 청년 장교에서 남한으로 귀순한 장인어른의 기구한 삶을 떠오르게 한다. 남북 간 화해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금강산 관광을 장인어른께 권유했으나 응하지 않으셨다. 장인어른은 북에 가족을 두고 혼자 남한으로 넘어왔다는 죄책감과 피해 의식 때문에 끝내 이북 땅을 밟지 않으시고 세상을 뜨고 마셨다.
한 편의 장편 소설을 읽고서 민족의 역사는 물론 가족사까지 돌아보게 하는 대작가의 열정과 역량에 그저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리고 싶다.
*이 글은 백재선 기자의 블로그(https://blog.naver.com/daul79)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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