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냐 바울이냐/문동환』를 읽고
사도 바울에 대한 후세 평가는 엇갈린다. 바울이 예수를 인류의 구원자로 내세우면서 기독교가 세계화되었다는 평가가 대체적이지만 그가 과연 예수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진 자들도 있다.
문동환 목사가 쓴 『예수냐 바울이냐』책은 바울 신학은 예수의 정신을 따르지 않았다면서 바울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문목사는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듯했지만, 그가 지향하는 세계와 선교 대상과 내용은 예수와 아주 달라 새 술이 새 부대가 아니란 헌 부대에 담는 꼴이 되어버렸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예수가 삶 속에서 서로 사랑하는 생태공동체를 지향했지만 바울은 재림한 메시아가 구원할 것이라는 대망공동체를 지향했다는 것이다.
유대인 부유 집안에서 태어난 바울은 처음에는 예수와 그 추종자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지만, 꿈속에서 예수를 만나 전회하게 되면서 예수가 바로 메시아라고 하는 신학을 창안했다.
바울은 당시 로마의 폭정 시대에 예수가 메시아로 재림하여 로마의 종교를 대체할 것으로 희망하고 이방인들을 메시아 왕국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대망 공동체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오히려 그 제국이 하나 되게 하는 일에 공헌하게 되었고 기독교는 2,000여 년 동안 바울 신학을 절대적으로 추종해왔다.
바울 신학은 유대교의 오랜 전통인 대망공동체를 지향하면서 내세보다 영생을 강조하는 한편 지배 권력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복종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결국 바울 신학에 근거한 기독교는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하여 아무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이에 대해 문목사는 “바울 신학은 예수를 유대민족이 대망(待望)하던 메시아라고 주장함으로써 예수가 창출한 ‘생명문화공동체운동’을 곁길로 오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원전 11세기에 세워진 다윗 왕조가 섬기는 일개 민족의 신을 유일신이라며 앞으로 올 메시아 왕국이 온 인류를 지배할 것이라는 민족주의 결과를 초래했다"라고 강조한다.
문목사는 책을 통해 그동안 기독교는 언제나 강자 편에 서 있었다면서 서양 역사에서 드러난 기독교의 잘못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한다.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기독교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다는 베드로의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하면서 갖가지 권위주의적 과오를 범했다. 바울이 예수가 다시 오실 때까지 그 권한을 하느님이 세상 나라에 주었다고 말함으로써 교회는 이 세상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은 국가를 통치하는 왕들에게 있다고 보았다.
로마 가톨릭교회에 항거한 종교개혁자들 역시 바울 신학에 바탕을 둔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하여 아무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르네상스 이후 과학이 발달하고 산업문화가 크나큰 발전을 하면서 영국을 위시한 서구의 국가들은 식민지 확보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에 기독교 선교사들은 배를 타고 약소민족에게로 가서 장차 망할 이 세상에 관해서는 관심을 끊고 예수를 믿어 메시아 왕국으로 가도록 하라고 선전했다. 그들은 교회 확산에 기세를 올렸지만, 성서를 주고 땅을 빼앗는 일에 협조했을 뿐이다.
우리나라도 일제 강점기 시대에 외국 선교사들을 통해 기독교가 들어왔지만, 당시 선교사들은 대부분 선교 확대를 위해 일제에 협력하면서 조선인들이 일제에 저항하는 대신 순종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문목사는 성서에 이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보람차게 하는 깊은 진리가 있음을 발견한다.
성서에는 있을 것을 있게 하시는 영께서 강자들이 구축한 바벨탑에 짓밟혀서 아우성치는 무리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삼고, 새로운 내일을 찾아 구하고 문을 두드리는 자들을 통하여 환희에 찬 ‘생명문화공동체’를 이룩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는 것이다.
문목사는 “생명문화공동체의 가르침은 성서의 첫 대목인 창세기와 출애굽기 그리고 갈릴래아 청년 예수의 삶과 선교에서 발견할 수 있다”라면서 “산업문화가 절정에 이르러 온갖 비극을 초래하는 오늘날, 그 가르침들은 새롭게 살아야 할 소망의 길을 제시해 준다”라고 강조한다.
예수는 탐욕, 권세욕, 오만함이 우리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지를 깨닫고 사랑으로 나누고 용서하고 섬기는 새로운 생명 문화 창출에 나섰다. 그의 선교는 사랑으로 섬기고 돕는 삶으로 시작해 그들이 새사람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게끔 깨우치게 하는 각성 교육적인 선교였다.
문 목사는 책에서 기존 기독교 주류 신학과 달리 몇 가지 파격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먼저 예수는 삼위일체의 신이나 인류 구원의 메시아가 아닌 구도자로 평가한다. 예수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구도의 길을 걸으면서 마침내 야훼 하느님과 기화(氣化)를 했다.
청년 예수는 야훼의 영을 아버지라고 불렀으나 이는 그가 영세 전부터 하느님과 동등한 그의 독생자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서 하느님과 기화함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종이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제자들에게 “구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반면 바울이 예수를 하느님의 독생자라 하며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같다고 한 것은 머릿속에서 나온 관념에 불과하다. 힘의 철학에 사로잡힌 자들이 이런 관념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강요하며 백성들을 다스렸다.
예수는 누구보다도 권위주의를 배격했다. 예수의 십자가란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대속이라기보다는 마지막 각성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문목사는 또한 성서의 야훼 하나님은 신의 이름이 아니라 신적인 존재를 설명하는 설명어라고 해석한다. 이 야훼는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시는 신비의 이름이다. 고대인들이 야훼를 영이라 생각했으며 이 영은 우주를 통하여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시는 능력이다.
야훼는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지 않고 강자들에게 억눌러 수탈당하는 약자들을 깨우치게 하셔서 그들이 새 역사의 주체가 되게 하시는 신비한 창조의 주체이시다. 야훼는 한 민족의 수호신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의 새 내일을 갈구하는 모든 인류에게 또 같이 기화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새 내일의 주체가 되게 하시는 영이다.
예수는 메시아의 재림이 아니라 있을 것을 있게 하시는 야훼 하느님이 한 많은 떠돌이를 깨우치시어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과 같이 땅 위에서 이룩되게 하실 것을 믿었다.
갈릴래아 청년 예수가 야훼의 진정한 전통을 이어받았지만, 바울은 야훼를 그들의 뜻을 수행하는 수호신으로 격하시킨 다윗 왕조의 야훼를 그대로 신봉하였다. 예수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 영의 기화를 통해 이룩한 생명문화공동체운동이 바울 이후 다윗 왕조가 조작한 유대교 전통으로 완전히 오도해버리고 말았다.
다윗 왕이래 야훼를 유대 민족의 수호신으로 격하시켰다는 바울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와 더불어 문목사의 여러 파격적인 주장은 기존 기독교에서 크게 반발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가톨릭과 개신교가 직면한 문제들을 볼 때 문목사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동안 지상의 최고 권력과 야합하면서 대형화와 이속을 추구해오면서 신자들은 떨어져 나가고 무신론자들은 종교 무용론까지 주장하고 있는 현실에 교회는 문목사의 주장에 오히려 귀를 기울여야 한다.
신학자와 목회자로 평생을 살아온 문목사가 돌아가시기 5년 전 92세 나이에 이런 책을 썼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평생 신앙을 결산하는 고백이라 할 수 있다. 문목사는 자신이 전문적인 성서학자가 아니라 교육학적 측면에서 책을 썼다고 하지만 오랫동안 기독교 목사와 학자로서 성서를 읽어온 끝에 나온 그의 이야기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예수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요한복음 10장 10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생명을 창조하신 야훼의 관심사도 약자를 도와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생명문화공동체를 이룩하는 것이다. 성서를 읽는 과정에서 무엇이 삶을 해치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삶을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인지를 항상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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