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은 흑화되었을까?
최근 진중권의 “확증이 없으니 위조의 가능성이 있다”는 발언은 두고 두고 그를 괴롭힐 것이다. 논술학원을 몇 달만 다녔거나, 혹은 조금만 영리한 초등학교 학생이라면, 저 말의 논리구조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논리를 이른바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전개했다. 그것도 한 때 이름 꽤나 알려진 논객이었다던 교수의 입에서 그런 논리가 전개됐다. 사람들이 그를 흑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어찌보면 전혀 무리는 아니다.
애당초 그의 발언은 법리를 따지고 말고 할 성격의 것조차 되지 못한다. 그냥 하나마나한 소리, 즉 ‘무용한 논리’를 전개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법 정신은 그러한 무용한 논리에 근거하여 국민 개인에게 불이익을 줘서는 안된다는 당연한 것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굳이 진중권을 위해 조금만 덧붙이자면, “확증이 없으니 위조의 가능성이 있다”는 그 말은 형식논리적으로 옳은 얘기다. 또한 “확증이 없으니 위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도 옳은 얘기다. 둘 다 불필요한 말이고 하나마나한 얘기라는 것이다. 그럴 때 법은 “확증이 있기까지 위조하지 않았음”을 국민 개개인에게 보증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어서 법 정신을 들먹거리기가 민망할 정도의 얘기라는 것이다.
진중권의 발언을 듣노라면, 궁금한 점이 한가지 생긴다. 즉, “진중권이 왜 유명하지?” 하는 것이다. 이번 발언을 두고 사람들이 진중권을 일컬어 ‘흑화되었다’라고 표현하는 이면에는 그가 한 때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일거다. 이상하리만큼 나는 진중권이 어느 한 때라도 괜찮은 논객이었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다. 그래서 궁금한거다. 진중권이 왜 유명하지?
이런 얘기가 떠올랐다. 아주 오래 전에 미국의 어느 한 음악가는 그가 사는 도시에서 자주 공연을 했고, 그 때마다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다. 어느날 그 음악가는 도시를 떠나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하게 되고, 십수년이 지나서야 다시 자기가 살던 고향에 돌아오게 된다.
다시 공연이 재개되었을 때 그를 기억했던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관람했으나, 그의 공연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사람들은 전에 느꼈던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의 연주솜씨가 이전보다 못한 탓일거라 생각했다.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의 연주는 십수년 전이나 그 후나 아주 비슷했다. 문제는 청중들이 바뀌었다는 사실이었다. 즉 음악을 듣는 청중들의 귀가 달라졌던 것. 십수년이 흐르는 동안 청중들 역시 좋은 공연을 자주 듣게 되었고, 그것이 이전 음악가의 음악을 알게 모르게 새로운 검증대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요즘처럼 SNS가 발달하지 못하고, 몇몇 매체들이 정보를 독점해왔던 시기에, 그저 몇 줄 내려쓸 수 있었던 논객이라는 존재는 사실상 귀한 존재였다. 그의 말이 옳던 그르던, 그의 말은 파급력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집단지성의 검증이 작동되지 않던 시절, 논객이라는 자들의 글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한 엄밀한 검증으로부터 면제되는 혜택을 누려왔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사람들의 생각은 지금처럼 세분화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진보는 – 얼마간의 분파는 있었다지만 - 대략 뭉뚱그려 진보였고, 보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분파성이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른바 진보논객의 글 하나하나는, 설령 어느 개개인이 일말의 의혹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런대로 수용되는 분위기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SNS의 발달의 최대 잇점은 모든 권위의 타파이다. 이제 누구도 더 이상 ‘신문에 그렇게 났어’라고 말하지 않는 때가 되었다. 논객의 글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반드시 누군가에 의해 그 오류가 지적되는 시기가 되었다. 논객이라는 자들의 수명이 짧아지고, 심지어는 반대 진영으로 투항해버리는 일들은 다반사가 되었다.
이를 일컬어 흑화라고 하지만 이는 분명 잘못된 표현이다. 그보다는 그들이 원래 자기 모습을 들켜버린 것이라는 표현이 옳은 표현이다. 음악가의 음악은 변하지 않았지만, 높아진 청중의 귀는 이제 그 음악가에게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 그 음악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뻔하지 않나? 비극은 그가 여전히 공연을 고집할 때 생길 수 밖에 없다.
진중권을 생각해보자. 잘 생각해보면, 그의 글 중에서 우리를 감동시켰던 것들이 몇 개나 될까? 아니 있기는 할까? 이상하리만큼, 적어도 내 경우에는, 진중권의 글은 몇몇가지 야만스러웠던 것을 제외하고 기억속에 남아 있지 않다. 불리한 토론장을 박차고 나갔던 그의 모습은 이러한 기억의 연장선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흑화되었다는 표현에 동의하지 않는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것일 뿐. 좋은 시절을 만나 어쩌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진짜 논객이었던 것처럼 기억되고 있었을 뿐이다. “확증이 없으니 위조의 가능성이 있다”는 그 무용한 명제는 그가 얼마나 위조된 논객이었는지를 확증해주는 기가 막힌 표현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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