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밀입국 경유지로 부상하는 나카라과
[ 원고 ]
2023년 12월 21일, 프랑스 마르느(Marne)의 바트리(Vatry) 국제공항에 루마니아 국적 ‘레전드 에어라인즈(Legend Airlines) 항공사 소속의 전세기 ‘Cet A340’편이 일시 착륙합니다. 바트리 국제공항은 파리로부터 동쪽으로 15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으면서 2022년 한 해 입국자 수가 6만2천명에 불과한 작은 공항입니다.
이 전세여객기가 착륙한 이유는 매우 단순했습니다. 승객들의 입국이나 환승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중간급유를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급유가 끝나면 다시 목적지를 향해 출발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급유를 마치고나서도 이 비행기는 다시 이륙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프랑스 경찰이 기내에 탑승합니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 비행기가 착륙하려던 시간에 맞춰, 프랑스 경찰에는 익명의 전화제보가 있었습니다. 탑승객들이 인신매매를 당할 것이라는 제보였습니다.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프랑스 당국이 이륙을 중지시켰던 것입니다.
이 비행기에는 303명의 인도인이 타고 있었습니다. 보호자 없는 11명의 미성년자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출발국가는 아랍 에미리트였고 바트리 공항에서 중간급유를 한 후 목적지인 니카라과로 출발할 예정이었습니다.
경찰은 곧바로 특정 승객 두명이 전체 승객의 여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게다가 이들 두 명이 엄청나게 많은 현금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게 됩니다.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프랑스 당국은 비행기의 이륙을 보류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갑니다.
조사 결과, 전화제보와는 달리 승객들을 대상으로 한 인신매매 범죄와는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승객 중 11명을 제외한 전원이 미국으로 밀입국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결국 승객 중 27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모두 인도로 되돌려 보내졌습니다. 27명 중 두 명은 승객여권을 모아 보관하고 있던 자들로서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했습니다. 25명은 현지에서 난민신청을 하기로 결정하면서 프랑스에 남게 됐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프랑스 당국이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프랑스 당국도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채고 있었으니까요. 이런 방식의 밀입국 시도가 처음이 아니라는 뜻이죠.
요즘 니카라과는 미국으로의 밀입국을 위한 중간기지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밀입국자들은 밀입국 중간기지로서 다른 중남미 국가들보다 니카라과를 선호합니다.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니카라과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입국이 매우 용이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에콰도르나 콜롬비아, 혹은 베네수엘라 등을 통해서 밀입국을 시도하는 경우 다리엔 갭(Darien Gap)이라는 매우 위험한 정글지대를 도보에 통과해야만 하는데, 니카라과에서 출발하는 경우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리엔 갭은 중앙아메리카와 인접한 남미 국가들로부터 파나마를 통과할 때 밀입국자들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정글지역입니다. 대략 160킬로미터 정도의 경로를 통과해야 합니다. 대략 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곳에 제대로 된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밀림을 헤쳐나가는 모험입니다. 기상 조건에 따라 통과하는 데에 빠르면 일주일에서 열흘 이상씩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통과하는 동안 몸이 아프거나 혹시 다리에 부상이 생기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어떠한 의료서비스도 받을 수 없습니다. 간혹 범죄조직이라도 만나게 되면 약탈과 강간은 흔한 일입니다. 무법지대이거든요. 야생동물의 먹이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이전에는 에콰도르를 통해 밀입국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니카라과가 중간기지로 더 선호되고 있습니다. 비자조건이 완화된데다가 위험한 다리엔 갭을 지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을 갖고 있으니까요.
다만 중국의 경우 양국간 비자협정에 따라 에콰도르 입국시 90일 비자면제가 적용됩니다. 이 때문에 중국인들은 에콰도르를 경유지로 많이 활용하고 있습니다.
밀입국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미국은 중남미 국가들에게 입국 비자조건을 강화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밀입국 가능성이 있는 입국자들을 미리 차단해달라는 것이지요.
유럽국가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합니다. 밀입국자들이 중남미 국가들로 바로 가는 직항편이 없는 경우, 유럽에서 환승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유럽국가가 환승비자를 요구하는 방식입니다. 단지 비행기만 갈아타는 것이지만 환승비자 요건을 까다롭게 함으로써 밀입국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한번 더 걸러내는 것이지요.
프랑스도 환승비자를 요구하는 국가들 중 하나입니다. 지난 2021년 초 샤를드골 공항에서 환승을 통해 중남미로 향하던 인도인들이 적발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미국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자 프랑스는 같은 해 4월 비자법 개정을 통해 인도 국적 승객에 대해 환승비자를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곧이어 우즈베키스탄 국적 승객에 대해서도 같은 조치를 취합니다.
하지만 이번 ‘Cet A340’편의 경우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이 비행기가 착륙한 것은 승객들을 환승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중간급유를 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비행기가 이곳에서 급유를 하지 않았거나, 혹은 익명의 제보가 없었더라면, 이들은 모두 원래 목적대로 니카라과를 향해 출발했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죠.
미국의 요청을 받은 국가들은 유럽이든 중남미 국가들이든 대개는 협조적입니다. 하지만 니카라과만은 예외입니다. 매우 비협조적입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난 2014년 니카라과는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쿠바 국적자들에게 입국비자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쿠바 국민들이 미국으로 무더기 불법이주 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지난 2021년 오르테가 대통령의 부정선거 문제와 인권침해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면서, 미국과 니카라과 두 나라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그런 와중에 쿠바에서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합니다. 그 여파로 미국으로의 불법이민이 급증합니다. 니카라과는 기다렸다는 듯이 쿠바 국민에 대한 비자요건을 무효화시켜 버립니다. 그러자 전세기를 이용해 단체로 니카라과에 입국한 후 미국으로의 불법이민을 시도하는 쿠바 국민들이 급증합니다.
계속해서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비자요건도 없애버립니다. 그리고는 인도, 우즈베키스탄, 모리타, 세네갈 등으로 비자요건 철폐를 확대합니다. 이제 니카라과는 미국 밀입국을 향한 중요한 통로가 돼버립니다.
지난 2023년 7월부터 9월까지 니카라과를 경유해 미국으로 밀입국을 시도한 아이티 국민의 수는 약 3만여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 달에 만명씩인 꼴이죠. 그러자 아이티 정부는 2023년 10월 30일, 니카라과로 가는 전세기 이용을 금지시킵니다. 이어 다음달인 11월 21일에는 불법이민자에게 전세기를 제공하는 기업의 소유자나 임원, 상급 관리자들을 겨냥한 새로운 비자 제한 정책을 발표합니다. 그 여파로 니카라과를 경유해 미국으로 밀입국 하는 국민들의 수는 일단 크게 감소합니다.
미국과 유럽, 그리고 몇몇 중남미 국가들의 신경이 예민해지면서 여러 전세기 운항사들이 니카라과로 가는 전세기 운항을 중단해왔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죠. 돈이 먼저인 항공사들도 있으니까요. 처음 말씀 드린 루마니아 국적의 항공사인 레전드 에어라인즈도 그 중 하나입니다.
아예 베네수엘라는 한 술 더 떠서 정부소유의 항공사를 통해 쿠바에서 니카라과로 밀입국자들을 실어 나르고 있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 이후 미국과 베네수엘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밀입국 문제에 관한 한 베네수엘라는 미국측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 두 나라간의 관계가 점차 회복될 조짐을 보이면서, 베네수엘라는 이 문제를 미국과의 협상카드 중 하나로 사용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Cet A340’ 기편과 관련, 인도 관계당국의 자체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이 비행기의 승객들은 일인당 4만8천달러에서 15만달러까지 지불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인도인들의 미국 밀입국 시도는 최근 크게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데요, 지난 2023년의 경우 약 10여만명이 도보를 통해 밀입국 시도를 했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2019년보다 10배 가량 증가한 것이라고 합니다.
밀입국과 관련, 비행사들의 노골적인 서비스 제공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광고는 주로 SNS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쿠바 수도인 하바나에서 니카라과 수도인 마나과까지 1500달러의 비용으로 운항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대 4천달러 상품도 있는데요, 여기에는 니카라과에서 멕시코까지 이동 도우미, 식사, 숙박, 입국 절차 도우미, 혹은 난민신청 도우미 등의 서비스가 포함됩니다. 현지에서는 이처럼 밀입국을 도와주는 도우미나 에이전트들을 일컬어 ‘코요테’라는 은어로 부르기도 합니다.
2024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미국으로서 밀입국 문제는 중요한 이슈 중 하나입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어떤 식으로든 밀입국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만 합니다. 니카라과의 입국 비자요건 강화는 좋은 해결책이 됩니다. 하지만 오르테가 대통령은 바이든의 말을 쉽게 들어주지 않을 것 같습니다.
미국은 이미 2021년의 니카라과 대선부정을 이유로 몇몇 경제적 제재조치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아울러 니카라과 정부인사들 및 오르테가 대통령 측근들에 대해 미국 입국비자를 제한했습니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자국의 입국 비자요건 강화를 미국의 제재조치 완화를 위한 협상카드로 남겨두고 있는 듯 싶습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지금의 밀입국 시스템이 니카라과로서는 은근히 돈벌이가 되고 있습니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의 국가들로부터 전세기 운행 계약을 만들어내기 위해 니카라과 정부가 민간기업을 고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국가주도의 비즈니스인 셈이죠.
랜딩피와 공항세도 정부 수입중 일부입니다. 공항세의 경우 일인당 100달러에서 200달러 정도입니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워낙 이곳을 경유하는 밀입국자들이 많다 보니 이것 저것 합하면 그런대로 돈이 됩니다.
정치적 박해로 인해 멕시코 국경을 통해 미국으로 이주한 니카라과 국민의 수는 60여만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여기에 니카라과를 거쳐 미국으로 밀입국한 외국 국적의 인원은 15만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이래저래 멕시코 국경을 넘어오는 밀입국자 수의 약 10%는 니카라과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미국측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니카라과를 경유한 밀입국과 관련, 바이든 행정부가 조만간 모종의 조치들을 내 놓을 것으로 미국의 언론들은 관측하고 있습니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오르테가 대통령이 협조하는 것이지만, 오르테가 대통령은 딴전을 부리고 있습니다. 마음이 급한 것은 바이든측입니다. 어떤 조치와 결과가 나오게 될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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