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위조 전문가의 삶 이야기
반평생을 불법적인 위조를 하면서 살아온 한 남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후 사람들은 그를 위조범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대한 위조자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그 위대한 위조자에 관한 얘기입니다.
1925년 아르헨티나에서 유태인 안나 카민스키(Anna Kaminsky)와 살로몬 카민스키(Salomon Kaminsky) 사이에 한 아이가 출생합니다. 그의 이름은 아돌포 카민스키(Adolfo Kaminsky)입니다.
아돌포 카민스키의 부모는 원래 러시아 국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884년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포그롬(Pogroms)으로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되자 이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이주합니다. 그리고 프랑스에 살기를 원해 1990년대 초 프랑스로 이주합니다. 하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자 이들 가족은 프랑스에서 적색분자로 몰리게 됩니다. 결국 아르헨티나로 다시 추방당하게 되죠.
이들 가족은 여전히 프랑스에 정착하기를 원해 다시 마르세이유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또 다시 터키로 추방됩니다. 터키는 지금의 튀르키예를 말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돌포 카민스키는 극심한 곤궁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때 어린 카민스키는 증서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증서가 없이는 인간이 유령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1932년 다시 이들 가족은 파리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비르(Vire)를 거쳐 1938년에 노르망디로 이주하게 됩니다.
여기서 초등학교를 마친 아돌포 카민스키는 생계를 위해 염색공장에 취업하게 됩니다. 염색공장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염색과 잉크에 관한 천부적 재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1941년에는 나치에 의해 어머니 안나 카민스키가 살해됩니다. 1943년에는 가족이 독일군에 체포돼 캉(Caen) 교도소를 거쳐 드랑시(Drancy) 캠프에 수용됩니다. 드랑시 캠프에 수용된 유태인들의 운명은 대개 홀로코스트를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때 머물렀던 아르헨티나 영사관의 개입으로 이들 가족은 가까스로 석방이 됩니다. 죽음의 목전에서 빠져나온 것이죠.
그리고 이들 가족은 위조문서의 취득을 위해 레지스탕스와 접촉하게 됩니다. 카민스키의 재능을 알아본 레지스탕스는 그를 요원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당시 유태인 조직인 유태인총연합(General Jewish Union)은 유태인들을 홀로코스트에서 구하기 위해 신분증 위조를 해 왔습니다. 유태인의 신분증에는 유태인을 나타내는 워터마크가 있었는데요, 이를 삭제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카민스키는 젖산을 이용한 제거방법을 제안합니다.
효과가 입증되면서 카민스키는 본격적인 문서위조 작업에 나서게 됩니다. 진짜 가까를 만들기 위한 카민스키 실험실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프랑스와 베네룩스 국가들에 필요한 신분증 위조를 본격화하게 됩니다.
신분증을 위조함으로써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14000명 이상의 유태인을 구했습니다. 물론 가짜 신분증을 만드는 일이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50여장의 가짜 신분증을 가방에 담아 가던 중 검문에 걸린 적이 있습니다. 이 때 카민스키는 18살의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검문소 초병에게 자신의 가방에 든 것이 샌드위치라면서 하나를 꺼내 초병에게 권하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이로써 위기를 모면하죠.
단 3일 동안 300여명의 아이들을 위해 900개의 위조문서를 만들어야 했던 적도 있습니다. 이를 시간 내에 채우기 위해서는 한 시간에 30개의 문서를 위조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계산은 간단했다. 내가 한 시간을 자면 30명의 죽음을 의미했다. 나는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만들고 또 만들었다. 가장 공포스러운 일은 기술적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었다.”
인명을 구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됐습니다. 프랑스 해방 후 그는 한 때 프랑스 군 비밀요원으로 채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식민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일을 그만둡니다.
그 대신 그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위한 문서위조를 계속합니다. 이들이 당시 영국령이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차별받던 알제리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줍니다. 이 과정에서는 그는 레일라(Leila)라는 여성을 만나 훗날 결혼하게 됩니다.
그가 도움을 준 나라들은 많습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하이티, 엘살바도르, 칠레, 멕시코, 식민 지배하의 그리스, 앙골라, 기니비사우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죠.
또한 그는 미국에서 베트남전에 참전을 거부했던 젊은이들을 위해 위조문서를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1962년에는 100프랑짜리 위조지폐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경제에 혼란을 줌으로써 알제리아 국민해방 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of Algeria)에 도움을 주려고 했던 것이죠.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건국 후에는 종교국가를 도울 수 없다는 이유로 위조문서 작업을 거절하기도 합니다. 1971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반 아파르트 헤이트(Anti Apartheid) 그룹에게 문서위조를 요청받습니다. 하지만 이 일의 배후에 아파르트 헤이트 비밀경찰이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그를 범죄혐의로 빠뜨리기 위한 덫을 놓은 것이죠. 이 일을 안 이후 그는 문서위조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됩니다.
그 후 그는 사진사, 색상전문가, 예술품 모작, 필름사진 복제 등과 같은 일상적인 직업을 갖고 생활하게 됩니다. 1951년에는 마르셀 까르네(arcel Carné)의 영화 애인줄리엣(Juliette ou la Clef des songs)에서 유명 데코레이터인 알렉산드르 트로너(Alexandre Trauner)와 협업하기도 합니다.
그는 그의 아내와 모두 다섯 명의 자녀를 가졌습니다. 그 중 세 자녀는 알제리에서 출산했습니다. 자녀 중 한 명은 래퍼로 잘 알려진 로세(Rocé) 카민스키입니다. 다른 한 자녀는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사라(Sarah) 카민스키입니다.
2023년 1월 9일 그는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문서위조는 당시의 법률로는 모두 불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그를 위조범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위대했던 위조 전문가입니다. 그는 자신의 위조문서 작업에 대해 댓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가 살아생전 남긴 말은 그가 왜 위대한 위조 전문가로 불려야 마땅한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물론 내가 한 모든 일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합법인 것이 반 인륜적이라면 우리는 맞서 싸워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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