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변신’과 ‘아내의 상자’, 그리고 ‘채식주의자’
1. 카프카 ‘변신’
이혼한 아내의 친구가 차라리 식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토로하자, 아내는 아예 돌이 되고 싶다고 되받아쳤다. 자신을 부단히 흔들어 대면서 할퀴고 있는 고단한 삶, 이를 끊임없이 자각해야하는 인식의 끈을 어느 순간부터 놓아버리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무엇이 그토록 여인들의 삶을 힘들게 했을지, 이를 되새기는 과정에서 문학은 때로 집요한 길잡이가 된다.
카프카는 소설 ‘변신’에서 식물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인식은 팽팽히 살아있는, ‘벌레’를 통해 현대인의 삶을 조명한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스스로 침대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벌레로 변한 것을 깨달았다.”
놀라움과 의문, 그리고 당혹스러움에 더해 결국 충격을 던지는 소설의 첫 구절은, 독자를 단번에 책 속으로 끌어당겨, ‘당신은 과연 벌레가 아닌가’라는 자각으로 숨돌릴 틈 없이 밀어 넣는다. 사람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주도해 살아간다고 하지만, 늘 불완전한 미완성의 존재이다. 더구나 일정한 역할과 기대를 요구받는다.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개인의 가치는 물질의 소유, 도구적 능력으로 급속히 대체되었다. 이제 내 삶의 가치는 내가 아니라, 주변이 결정짓고, 개인의 지위와 재화가 그의 가치에 서열마저 부과한다. 개개인의 삶은 하나의 도구처럼 사회 속에서 작동하다, 폐기된다. 자동화 사회에서 기능으로 전락해버린 자신의 삶을 자각하거나, 혹은 기능의 가치를 상실하는 순간 그는 ‘벌레’라고 선고받는다.
이 선고를 내리는 심판관은 사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이다. 사회가 오랜 세월 꾸준히 파견한 심판관을 스스로 받아들여, 내면에 권위를 부여해서 모셔놓은 탓이다. 혈연을 기반으로 끈끈한 유대를 맺는 가족들 사이에도 이 잣대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를 맞고 서서히 죽어간다. 벌레를 증오하던 누이동생은 가족과 함께 홀가분한 심정으로 교외로 나들이를 나가, 사망한 그레고르의 장래식을 논의한다. 도구적, 기능적 사회를 피해 자신의 삶속에만 몰두하는 ‘오타쿠’를 가족이 밥벌레라고 부르다, 그가 노숙자로 객사했을 때 그 시신을 병원의 해부실습용으로 팔아 버렸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2. 은희경 ‘아내의 상자’
1998년 제22회 이상문학상을 받은 은희경은 ‘아내의 상자’에서 신도시에 사는 한 주부를 통해 카프카의 망령을 되살려낸다.
성실한 직장인 남편을 둔 그녀는, 그럭저럭 행복한 일상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늘 같은 시간에 밥을 짓고, 남편을 배웅하고, 배란일에 맞추어 거북한 성관계를 갖는 그런 일상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이웃에 한 여인이 이사오면서 정규분포에 가까운 표준적 균형이 깨지고, 외도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일상을 무너뜨린 뒤 비로소 탈출한다.
아내는 신도시의 아파트 단지를 ‘지루한 안정의 빛’과 ‘냄새마저도 도식적’인 곳으로 진단한다. 그녀의 삶이, 주어진 도시에서 주부의 역할, 또 아이를 출산하는 중산층 가정의 양육 도구로 전락해 스스로 사육되고 있다는 현실을 정신병적으로 자각해 가는 것이다.
그녀의 부엌이나 방은 어떤 여자가 들어와 당장 살기 시작해도 이상한 점이 조금도 없을 만큼 표준적이었다고 묘사된다. 아내의 외도는 바로 이러한 자신의 역할에 대한 거부, 나아가 포기와 탈출의 복합 선언이었던 셈이고, 그러한 그녀는 정신병원에 버려진다. 정신병원에 실려가면서 남편과 본 텅 빈 닭장은 그녀의 삶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짧은 풍경이 된다.
남편에게 아내는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아이를 낳고, 살림을 꾸릴 수 없는 폐기 대상의 벌레였을 뿐이다. 마치 닭장 속의 닭처럼.
3. 한강 ‘채식주의자’
그 아내는 이제 본질적인 원형의 여성성을 지닌 채식주의자 영혜로 다시 태어난다.
그녀는 ‘상자속의 아내’와 달리, 원형성이 훼손되는 과정에서 이를 치유해보려고 몸부림치지만, 그녀를 둘러싼 환경은 더욱 가혹하다. 상품화된 사회, 가부장적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그레고르보다 훨씬 심각하다. 더구나 그녀가 지닌 무채색의 원형성은 무방비 상태로 일방적인 상처를 받기 쉬운, 작고 연약함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폭력에 길들여진 아버지의 일상적 폭력, 계산된 합리주의로 결혼하는 남편, 자연과 생명에 가하는 인간의 폭력 속에서 그녀는 ‘채식주의’를 선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저항을 시작한다.
그녀는 성인이 되어서도 원형적 여성성, 인간이 타고난 근원성을 환기시키는 몽고반점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래서 여성에게 요구하는 도구적 아름다움에 대해 철저하게 무심한 편이다. 단순한 디자인의 검은 구두에 무채색의 옷들을 선택하고, 각질이 일어나는 그녀의 피부는, 사회가 요구하는 미적 기준과 단절된 그녀의 삶을 보여준다.
도대체 언제부터 누가, 여성에게 화장을 강요하고, 브레지어를 차도록 요구했고, 이것이 당연시되었느냐고 그녀는 묻고 있다. 그녀에게 향수는 식물을 짓이겨 동물의 자취를 감추는 수단이며, 육식은 자연의 원초적 생명성에 폭력을 가한 결과물일 뿐이었다. 그녀가 정신병원에서 움켜쥐고 물어뜯은 작은 동박새는, 그녀에게 가해진 상처의 깊이를 짐작케 한다.
그녀가 지닌 원형의 가치, 관습과 통제를 벗어난 본연의 인간상을, 한 비디오 예술가는 몽고반점을 통해 즉각 통찰해내고 흥분한다. 탐욕과 상업성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여성미와 그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런 성의 모습을 담고자 했던 그에게 그녀는 일종의 구원이었던 셈이다.
그는 그녀와 자신의 육체에 꽃그림을 그리면서, 성과 사랑이 아무런 삶의 때나 관습에 찌들지 않았을 때, 자연 본연의 쾌락이 된다는 사실을 작품에 담고자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에게 느끼는 성욕은 더 이상 사회적 구속과 통제가 없는 인간 대 인간의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결합이다. 꽃그림과 무늬로 뒤덮인 두 남녀의 성관계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벗어던진 태초의 원형성으로 회귀하려는 시도였지만, 이 시도는 결국 이 둘을 벌레로 전락시킨다.
그들은 가족 관계로 묶인, 이른바 사회적 성적 금기의 벼랑 끝에 서 있었다. 그들의 사회적 삶은 파멸한다. 이제 그녀는 모든 음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식물이 되기를 갈구한다. 거대한 땅과 결합되어 원초적인 자연의 일부로서 회귀하려는 열망을 보여준다. 생명과 삶은 어떠한 경우에도 지켜야되는 통념에 대해, 필연적으로 생명을 죽여야되는 모든 음식을 거부하면서 해답없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영혜의 언니는 사회에 순응하고 적응하면서, 억척스레 살아가는 현명하고 현실적인 여인이다. 그녀는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 비디오 예술가에게 헌신을 다하면서 아이를 키워내는 가장의 역할을 씩씩하게 해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경제적 성공을 보여주는 아파트 집들이에서 영혜의 발작이 일어나고, 그녀의 삶도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그녀는 애지중지 키우던 하나뿐인 아들을 두고 자살을 결심한 자신에게 깜짝 놀란다.
다시 현실, 영혜를 살리기 위해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그녀는, 아픔과 상처를, 그리고 ‘벌레’마저 포용하는 또 다른 원형의 여성성을 언뜻 보여준다. 어쩌면 그녀는 다시 태어나면 돌이 되고 싶은, ‘화석주의자’ 인지도 모른다.
벌레와 아내, 그리고 채식주의자는 현대사회의 패배자, 루저들이다. 그런데 세 소설은 이러한 루저들을 통해, 우리가 당연스레 여기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뿌리깊은 악성 종양을 품고 사람들을 마비시키고 있는지, 한번쯤 되돌아보라고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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