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별희
젊은 시절 보았던 영화 패왕별희에서 사랑과 경극을 봤다면, 10년 세월씩 몇번을 더 보내고 다시 만난 패왕별희에서는 유독 아픔이 보였다. 나이 탓인가? 주제인줄 알았던 사랑과 경극은 소재에 불과했다.
비극의 시작은 주인공인 청데이가 현실과 다른 세계의 삶 속에 자신을 이입하면서부터이다. '원래 남자로 태어나' 다른 세계로 들어가기를 몇번이고 거부했던 어린 두지는 어느 날 '원래 여자로 태어난' 세계의 문을 열였다. 그날 이후로 두지에게, 그리고 훗날의 청데이에게 경극은 그가 사는 단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
패왕에 대한 우희의 사랑은 목숨만큼 크고 무거웠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목숨만큼 크고 무거운 또 다른 무엇이 있기는 한 것일까? 연인을 위해 죽은 그녀의 사랑은 2천년 이상의 세월을 뛰어 넘어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윤회했다. 어느 쪽에도 관객의 눈에 비친 비극의 무게는 같았다. 좋은 영화란 이런 것이다.
하지만 패왕은 경극 속에서 살지 않았다. 그는 매우 현실적이었고 패왕이 아닌 단샬로의 삶을 살았다.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현실의 여성과 결혼했고, 이는 경극의 삶과 하나였던 청데이와의 갈등의 씨앗이 됐다. 씨앗의 껍질을 뚫고 나온 싹이 비극의 열매를 맺을 참이었다.
경극 속 우희의 사랑도, 현실 속 단샬로의 사랑도 그 크기나 가치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몸 파는 여자'라는 주홍글씨를 죽는 순간까지 떨굴 수 없었던 주샨의 사랑이 더 애틋하고 진심이었다고 느껴지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의 신발까지 모두 내놓고 맨발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이 가진 마지막 하나까지도 망설임 없이 온전히 내어 놓는 것. 사랑을 얻기 위해 신발까지 내놓았다면, 그것이 무너졌을 때 목숨을 내놓는 것 또한 주저하지 않았다. 진실한 사랑은 생계의 천함과 고귀함에 있지 않았다.
세명의 주인공 중 그녀는 진정한 사랑을 알았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역사의 비극 앞에서는 사랑도 경극도 한낱 큰 물결에 휩쓸려가는 나무조각과 같은 것, 그 누구도 비극을 나누는 일에 비켜갈 수는 없다. 사랑은 거짓 사랑이 됐고, 이를 만인 앞에서 고백해야 하는 것은 생존의 조건이 됐다.
본인들에게는 아무리 절실한 그 어떤 것이었을지라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그저 무기력하게 휩쓸리는 어떤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랑도 경극도.
문화혁명은 중국인들에게 큰 아픔이었고, 그 아픔은 아직 진행형이다.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 혁명시기의 자신은 누군가로부터의 피해자였고 동시에 누군가에 대한 가해자였을 것이다. 긴 세월이 더하면 피해자로서도, 가해자로서도, 아프기는 다 마찬가지인 것. 그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은 오직 망각하는 것. 당시의 삶을 가슴에 묻고 차마 다시 밖으로 꺼내기 두려워하는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침묵 속에서 혁명의 아픔은 아직 진행형이다.
대담하게도 이 영화는 잊혀진 아픔을 다시 꺼내어 들었다. 경극이라는 독특한 소재와, 비극적 사랑이라는 일상의 소재를 적절히 버무림했다. 경극 속 우희의 죽음도, 사랑 속 주샨의 죽음도, 비극적인 격변의 세월과 함께 어우러짐에 전혀 어색함이 없다.
경극속에서 우희도 진실한 삶을 살았고, 그저 '한낱 매춘부'였던 주샨도 진실한 사랑을 추구했다. 단샬로가 지독히 현실적이었던 것도 그로서는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 어느 누구의 삶 하나도 버릴 것은 없다. 하지만 거대한 역사의 비극 속에서 이들의 삶은 모두 버려졌고, 영화는 그 아픔을 지독하리만큼 담담하게 표현했다. 작가와 감독과 배우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조광태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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