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몰랐던 암행어사 이야기] - 1. 도망친 감찰어사 허척(하)
| 도망친 행대감찰 허척(하) |
사간원의 공세와 왕의 마무리
허척이 도주했다는 말이 사간원에 전해지자, 사간원의 관리들은 표정을 관리하기에 바빠진다. 사헌부를 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 얼마나 기다렸던 기회인가? 엄밀히 말하자면 사헌부의 주된 역할은 감찰이었고 사간원의 주된 역할은 간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얘기였고, 경계가 애매하여 서로 자신들의 영역이라 다투었던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은 태생부터 이미 물과 기름사이일 수 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왕이 재위한지 2년만에 사헌부와 사간원이 서로 탄핵하여 사간원의 좌사간(左司諫) 진의귀(陳義貴)가 광주(廣州)로 귀양가는 일이 발생했으나 다시 그해 6월에는 사헌부에서 사간원 최긍(崔兢)을 탄핵하는 일이 발생했다. 사헌부와 사간원이 서로 탄핵하기를 일삼자 7월에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를 모두 파직시켜 버린 사건이 발생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해 말에도 역시 사헌부가 사간원 관리들을 거듭 탄핵했다. 다음 해 사간원에서 지방행정 조직 개편을 건의하면서 다시 사헌부와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재위 4년 1월에 사헌부에서 사간원의 형조 관원을 탄핵하여 처벌받게 하자 3월에는 사간원측이 사헌집의(司憲執義) 윤사영(尹思永)과 최유경(崔有慶)을 각각 탄핵했고 이번 사건이 발생하기 일곱달 전인 3월에는 역시 사간원측이 대사헌(司憲府大司憲) 함부림(咸傅霖)을 탄핵하는 등 크고 작은 갈등이 그치지 않았다.
허척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사간원측은 발빠르게 허척의 형제 허주(許周)와 허조(許稠)를 잡아들였다. 허척을 도주토록 방관했다는 이유로 장령 서선을 순금부에 가둘 것을 왕에게 청하고 곧장 탄핵 절차를 개시했다. 여기에 대사헌 박신(朴信), 장령 현맹인(玄孟仁), 지평(持平) 성엄(成揜), 신경원(申敬原) 등이 함께 탄핵 대상이 되었다. 애당초 최영기 사형은 합당치 않다고 했다가 뒤늦게 육전을 들먹거리면서 다시 합당하다 번복했으니 이는 인명의 중대사를 가벼이 여긴 처사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왕에게 직접 의견을 전달했던 장령 서선에 대해서는 순금부에 가두어도 좋다는 윤허가 떨어졌다.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간원의 다음 상소가 이어졌다. 의정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래 허척은 오종길과 최영기의 죄를 의정부에 보고하면서 이들을 참수해도 좋은지 물었는데, 우정승, 참찬, 참지부사 등이 왕에게 묻지도 않고 사형을 허락했으니 이 또한 죄를 물어야한다는 내용이었다.
왕의 고민이 이어진다.
‘이러다간 살아남는 자가 없겠구나’
생각해보면 허척이 잘못만 한 것은 아니었다. 권한을 넘어 행동한 것은 맞지만, 그러지 않아도 골치가 아프던 국경지역의 밀무역이 한동안은 사라질 것이다. 밀무역을 통해 중국으로 넘어가는 금과 은에 어떤 식으로든 지방 수령들이 개입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금과 은이 만들어지려면 결국 죽어나는 것은 민초들 뿐이다. 평주와 강음에 권세가들이 토지를 강제로 점유하는 일이 많아졌던 것도 알고 보면 밀무역과 뿌리가 닿아 있는 일이다. 소작농이 부쳐먹던 밭뙈기를 회수하여 인삼밭을 만들어버리는 일도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명에 사신으로 가면서 밀무역을 하려 했던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한로(金漢老)를 파직한 일이 있지 않았던가. 그만큼 밀무역은 조정에 꽤나 골치아프고 뿌리깊은 문제거리였던 것이다.
이만한 일로 조정을 뒤흔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대사헌을 넘어 의정부까지 이 일을 추문(推問)하게 되면 거기가 끝이 아니라 지금부터 시작이 될 것이다. 알고 보면 왕에게도 인재 하나 하나가 귀한 판국이다. 왕의 직감이 다시 한 번 발동한다.
“이쯤에서 마무리해야 할 일이다.”
도승지에 명하여 문서를 작성케 한다. 허척은 파직하되 더 이상 죄를 묻지 않도록 하고 그의 상관인 박신 등 다섯명에 대해서는 행대감찰을 잘못 관리한 책임을 물어 각각 다른 곳으로 귀양시키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했다. 의정부에 대해서는 본디 밀무역에 대해 엄하게 금해왔던 점을 감안하여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을 보인다.
화려한 부활
허척의 형제 허주와 허조는 사실상 아무런 잘못이 없으므로 11월 16일 방면된다. 하지만 허척은 숨어있기를 계속하다가 해가 바뀌기 직전인 12월 29일에 순금사에 들어 자수한다. 왕이 안주(安州)로 귀양시켰다가 다음 해 7월 잘못을 용서하고 한양 외곽에 일하게 했다. 세종 2년에는 사헌부 지평에 올랐으니 그간 허척이 쌓아놓은 인맥이 크게 작용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 후 몇 번의 우여곡절을 거쳐 우참의, 좌참의,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다. 자칫 죽을 목숨이면 일단은 도망이라도 하고 보는 것이 결국은 올바른 판단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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