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탄천풍경
탄천풍경
탄천의 순 우리 말은 숯내다. 탄천의 유래는 이렇다. 삼천갑자동방삭이란 사람이 18만 년을 살면서 세상을 어지럽히자 옥황상제가 그를 잡기 위해 꾀를 내었다. 병사들에게 천(川)에서 숯을 씻도록 한 것인데 이 모습을 우습게 여긴 동방삭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바람에 붙잡혔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백제 때 군사들에게 먹일 물이 필요해서 천에 숯을 뿌려 정화시켰다는 설도 있다. 두 이야기 모두 숯과 연결되어 지금의 탄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봄에는 개나리, 진달래, 조팝나무, 목련, 벚꽃 글자 그대로 꽃 대궐이다. 가을 단풍도 총천연색 물감을 화려하게 내뿜으며 산책길을 더디게 한다. 물가쪽 버드나무는 연녹색 파스텔을 뿌려 놓은 듯, 가늘고 긴 가지가 축축 늘어진 것이 자유분방하다. 버드나무는 가지를 잘라 다른 곳에 심어도 뿌리를 내리며 잘 자란다고 한다. 옛날 기생들은 정인과 이별할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주며 자신을 잊지 말라고 했다는데 탄천 버드나무도 그루그루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심어졌을 수도 있을 것만 같다. 배고프던 시절에 씨를 불려 국수를 해 먹었다는 싸리나무, 검정콩처럼 땡글땡글 열매를 맺는 쥐똥나무도 볼 수 있다.
쑥이나 민들레 질경이 등은 이른 봄, 나물 캐러 나온 할머니들의 반가운 손님이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나물 캐던 처녀 적 기억이 새록새록한 듯 한결같이 행복한 표정들이다. 야생화와 풀도 구석구석 들어차 있는데 독일의 국화라는 수레국화, 보랏빛 쑥부쟁이, 노리개 모양을 닮은 산괴불주머니, 노란색 천연염료로 쓰이는 애기똥풀. 그 중 제일 흔한 꽃은 개망초다. 개망초를 보면 개나리나 개양귀비처럼 이름 앞에 ‘개’자가 붙은 것이 뭔가 주류에서 밀려난 듯해 짠한 마음이 들곤 한다. 꽃이 올망졸망 소박한데 일본을 통해 들어와 ‘왜풀’이라고도 부른단다. 듣고 보니 어딘가 왜색 느낌이 나는 듯하다.
탄천의 터줏대감인 까치, 참새, 비둘기는 늘 바쁘게 먹이를 찾고 떼지어 날아다니는데 전에는 길조나 평화의 상징으로 사랑받던 이들이 언제부터인가 농작물을 해치는 민폐조류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언제나 곁에 있는 텃새보다는 가끔 찾아오는 철새를 더 좋아한다. 백로와 왜가리, 청둥오리, 도요새, 민물가마우지 등 탄천을 찾는 새 종류만 20여 종이 넘는다고 한다. 백로와 왜가리는 자주 헷갈리는데 백로는 흰색이고 왜가리는 회색빛이 섞여 있다. 왜가리에게는 미안하지만 사람들은 이 새를 보면 무조건 “야! 백로다” 하며 환호한다. 백로는 긴 다리를 꼿꼿이 세우고 먼 데를 응시하며 고고하게 서 있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카메라 셔터를 여는 순간 약 올리듯 푸드득 날갯짓하며 날아오른다. 자기가 멋지다는 것을 아는 듯하다. 사람이나 새나 잘생기고 볼 일이다.
물속 생물 중 압권은 누가 뭐래도 잉어다. 탄천은 그야말로 물 반 잉어 반이다. 5월은 잉어의 산란기인데 이 때는 알을 낳으려는 암컷과 수정을 시키려는 수컷들의 바쁜 움직임으로 탄천이 요동친다. 어찌나 힘차게 퍼덕거리는지 그 소리가 쩌렁하다. 종족을 퍼뜨리려는 생명체의 힘은 어디서 왔길래 저리도 강렬한가 싶다. 잉어는 산란기뿐 아니라 사철 볼 수 있는데 보통은 크기가 어른 팔뚝만 하지만 어떤 놈들은 산책 나온 강아지보다도 더 큰 것들도 있다. 사람들이 과자며 빵 등을 주어 사람 근처에 유독 바글거린다. 잉어와 망둥어를 포함, 탄천에 사는 물고기는 30여 종이라 하니 물속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치열할 것이다. 애기부들, 개구리밥 등 물가에 사는 풀들도 한 식구다.
사시사철 생동감 넘치는 탄천은 운동하기에 더없이 좋은 자연 헬스장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자전거며 롤러스케이트며 운동을 시키느라 자주 갔다. 지금도 배드민턴이나 농구를 즐기는 아이들의 놀이터인데 요즘처럼 코로나로 실내 운동도 못하고 나처럼 산에 오르기가 힘든 사람들에겐 안성맞춤 운동장이다. 군데군데 운동기구도 있어 근력운동도 할 수 있다. 햇살 퍼지는 오전, 하늘 보고 쉼호흡 하면서 두 팔을 힘차게 흔들며 걷고 나면 하루 일용할 양식을 비축한 듯 뿌듯하다.
마음이 복잡할 때는 무작정 탄천으로 달려간다. 벤치에 앉아 펑펑 소리 내어 운 적도 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을까? 왜 하필 나일까? 원망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왜 너는 안 되지? 탄천의 준엄한 대답에 하는 수 없이 백기를 들게 된다. 맞다, 네 말이 맞다. 수용하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지곤 했다. 내 잘못, 내 실수를 한탄하며 조급해 할 때는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어. 누구나 그래” 이번엔 따뜻한 음성이 들려온다. 탄천의 위로로 미웠던 나 자신을 다독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살아갈 힘을 모으곤 했다.
이번 추석엔 시어머니를 모시고 탄천 산책에 나섰다. 자연을 좋아하시니까 기뻐하실 것 같았다. 갈대 옆에서, 단풍 아래서, 돌다리에서 사진도 찍어드리고 나무와 꽃, 새와 물고기들을 천천히 들여다보며 이름도 알아보고 어머니의 어릴 적 기억들도 함께 더듬어 보았다. 마침 근처 초등학교 아이들이 짓는 농작물도 있다. 작은 논과 밭에 벼와 옥수수, 가지 등이 아이들의 웃음소리처럼 쫑알쫑알 크고 있다. 탄천을 천천히 감상하시던 어머니께서 떨리는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여기는 사람 사는 곳이 아니다” “여기는 천국이다. 천국이 딱 여기구나” 하신다. 그리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읊조리듯 기도를 하셨다. 어머니는 탄천 풍경이 좋으시기도 했지만 그 보다는 이런 좋은 곳에서 무탈하게 살고있는 자식들에 대한 고마움과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하셨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벌써 20년이다. 20년 동안 친구이자 위로자이자 호된 스승이기도 한 탄천을 나는 사랑한다. 나무와 풀과 새와 물고기들의 터전, 치열하지만 조용하게, 분주하지만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조화롭게 살고 있는 그들을 나는 존경한다. 같은 자리에서 존재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는 삶, 말없이 큰 품으로 쉼터가 되어 주는 삶이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지난 홍수로 탄천은 몸살을 앓았고 지금은 보수공사 중이다. 새로 정비된 탄천이 지금보다 멀어지는 느낌이 들까 내심 걱정이다. 부디 탄천의 정겨움과 따뜻함이 훼손되지 않기를 바란다.
글, 사진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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