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몰랐던 암행어사 이야기] - 1. 도망친 감찰어사 허척(상)
| 도망친 행대감찰 허척(상) |
암행어사의 전신 행대감찰
행대감찰은 암행어사의 전신이다. 태조 14년에는 행대감찰 정개(鄭愷)가 말을 증여받고 민전을 빼앗은 수군 절제사 김을보(金乙寶)를 탄핵한 바가 있다. 정종 원년 8월에는 각 도에 행대감찰을 보내 민심을 살피고 수령과 향리를 비밀리에 관찰케 했다. 첫 얘기는 태종 5년 서북면(西北面) 관청의 감독과 검열을 위해 파견됐던 행대감찰 허척(許倜)에 관한 것으로 시작한다.
왕이 의정부를 통해 서북면 행대감찰 허척의 보고를 받은 것은 재위 5년(서기 1405년) 10월 20일경의 일이다. 보고를 채 듣기도 전에 미간이 찌푸려지면서 들릴 듯 말 듯 혼자말을 한다.
“이런 고얀 경우가 있나?”
보고가 끝나자마자 왕의 명령이 떨어진다.
“장령(掌令) 서선(徐選)을 들라 하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 왕의 성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대신들이다. 사헌부는 자칫 벌집이 될 것이다. 의정부도 피해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사간원은 이번 일로 쾌재를 부를 수도 있다. 잘만 하면 이번 기회에 사헌부를 아예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왕 또한 대신들의 계산을 모를 리 없다.
죄인들의 목을 베어버린 행대감찰
보고의 내용은 이러했다. 허척이 병사를 풀어 밀무역 하던 자 둘을 잡아들였다는 것이다. 그 중 한 명은 오종길(吳從吉)이라는 자로 이 곳 저 곳을 다니면서 밀무역을 하는 흥리인(興利人)이었다. 다른 한 명은 와주(窩主) 최영기(崔永奇)였는데 와주란 당시 도적이나 노름꾼 등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 다음 보고의 내용은 기가 막혔다. 허척이 이들 둘의 목을 모두 베어렸다는 것이다. 물론 행대감찰에게 어느 정도의 권한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주어진 권한의 한계는 현지 관리들의 실태를 살펴 보고하는 체찰(體察)까지였지 범죄자를 스스로 처벌할 수 있는 직단(直斷)의 권한까지는 아니었다. 비록 중한 죄인이라 하나 둘을 목까지 베어버린 것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어선 것이었다.
죄인을 중하게 처벌함에 있어서는 상급기관인 사헌부나 왕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인데, 지금은 왕이 오히려 통보를 받은 셈이 됐다. 위아래가 바뀌어도 한참 바뀐 꼴이다. 게다가 지금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한지 겨우 열세해가 됐을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왕의 권위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일을 모른 체 넘어갈 왕은 아무도 없다. 더욱이 지금의 왕은 이방원이 아니던가?
왕의 분노
서선이 들자 왕이 묻는다.
“언제부터 선참후계의 법도가 있었더냐?”
선참후계란 먼저 베고 나중에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서선이 몸을 떨기 시작한다. 행대감찰의 잘잘못을 따지는 일에 사헌부 장령이 떠는 이유는 있다. 무엇보다도 행대감찰이 사헌부의 관할하에 있기 때문이다. 올들어 풍해도(지금의 황해도)와 서북면(평안도 인근)의 가뭄이 극심했다. 게다가 평주와 강음에서 권세가들이 토지를 맘대로 점유하는 일이 발생하자 지난 4월 행대감찰을 보내 이를 금했던 적이 있었다. 이 일에 성과가 있자 7월에는 지방의 민심을 살피기 위해 감찰을 뽑아 쓰자고 왕에게 간했던 터였다. 이 과정에서 허척을 직접 파견한 것은 물론 사헌부였다.
“허척이 마음대로 흥리인을 죽였으니 잘못입니다.”
최영기를 죽인 일은 괜찮냐고 왕이 다시 힐문한다.
“척이 와주 최영기를 죽인 것은 잘못입니다.”
왕이 다시 주문한다.
“마음대로 죽인 것이 잘못이라면, 그 죄를 물어 마땅히 죽여야 하느냐?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그리고 허척으로 하여금 사마(私馬), 즉 사가(私家)의 말을 구해 타고 올라오라 명한다. 이로써 허척은 이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됐다.
풍전등화의 행대감찰 목숨
사마(私馬)를 타고 한양으로 올라오라는 얘기는 일의 처리가 급하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말이 필요 없을 만큼의 기한을 넉넉히 주었을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급히 맡기거나 처리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은 없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지만, 만일을 대비해 입궐에 앞서 사헌부에 들러보기로 결정한다. 사헌부야말로 자기의 친정과 같은 곳이 아닌가?
장령 서선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허척은 자신의 운이 다하였음을 직감한다.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 서선에게 호소한다.
“장령 영감, 사전보고가 없었다는 말은 사실과 다릅니다. 의정부에 보고했으니 살펴주십시오.”
서선도 내심 안심을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허척을 살려두어야 한다. 허척이 물고가 나는 날에는 자신들도 어찌 될지 한치 앞을 알 수 없다. 지체없이 사실조사에 나선다. 이미 남의 일이 아니다.
참수를 하기 전에 의정부에 먼저 보고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일단은 선참후계라는 가장 큰 멍애는 벗은 셈이다. 형을 집행한 것이 국법에 따른 것인지 아닌지, 그것을 따지는 일만 남았다. 어쩐 일인지 사헌부는 이날 더 이상 조사를 진행하지 않고, 허척을 귀가시킨다. 서선이 허척에게 무엇인가 귀엣말로 이른다. 묵묵히 듣고만 있는 허척.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한없이 무겁기만 하다.
수포로 돌아간 구명노력
박신(朴信)이 사헌부 대사헌의 직을 맡게 된 것은 8월 19일, 그러니까 고작 두 달 전의 일이다. 사헌부가 감찰을 뽑아 쓰자고 한 것은 그보다 한 달 전인 7월의 일이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이번 허척의 건은 박신에게 크게 잘못이 없다 할 것이다. 하지만 행대감찰 자체가 사헌부의 일이니만큼 그 불똥이 자신에게 튀지 말라는 법은 없다. 사헌부에 심각한 토론이 이어진다. 왕에게 전할 사헌부의 입장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도 장령 서선이 사헌부를 대표하여 왕에게 간다.
서선은 허척이 오종길을 죽인 것은 잘못이 없다는 사헌부의 입장을 왕에게 전달한다. 사실 흥리인을 죽이는 것은 처음 처음 일은 아니었다. 고려말 공양왕 3년에는 역시 서북면에서 찰방별감을 지냈던 안노생(安魯生)이라는 자가 의주에서 밀무역을 하다 들킨 십여명의 목을 한꺼번에 벤 일도 있었다. 그 후 밀무역에 대한 규율이 정연해졌고 국경지역에서 밀무역이 한꺼번에 자취를 감추었던 전례가 있었다.
왕이 일단 수긍한다.
“허면, 최영기는 왜 죽였느냐? 육전(六典)에는 이 법이 없다. 사헌부는 어찌하여 마땅히 사람을 죽인 죄를 청하지 않고, 사전보고 하지 않은 것만을 문제삼는가?”
허척을 구명하려는 서선의 생각을 왕은 단박에 눈치챈다. 사전보고하지 않은 것만을 문제삼는다면 허척은 이미 무죄이다. 눈치가 빠른 왕이다. 서선도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어차피 내친 걸음이다.
“영기는 죽을만큼 잘못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육전에는 이를 ‘엄히 금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엄히 금한다는 말은 이를 어길시에 죽여도 된다는 말이니, 영기 또한 죽여 마땅합니다. 내버려두고 논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말에 왕의 언성이 높아진다.
“비록 가벼운 죄라 하더라도 마땅히 정당하게 따져봐야 하거늘, 죽이지 않아도 될 사람 목숨을 죽인 것이 괜찮다는 것이냐?”
여기서 한마디 더 말을 보태면 서선도 무사치 못할 것이다. 서선이 입을 다물고 왕의 눈치만 살핀다. 마땅히 정론을 거쳐 일을 처리해야 하는 사헌부가 지금 이 무슨 꼴이냐는 왕의 질타가 다시 한번 떨어진다.
행대감찰의 도주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허척에게는 기가 막힐 일이다. 이제 곧 자신의 생사가 일순간에 오락가락 할 것이다. 설령 죽음을 모면한다 하더라도 얼마만큼 옥살이를 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죽지 않을 만큼 곤장을 맞고 어디론가 유배되어 그곳에 뼈를 묻게 될 수도 있다. 아니, 이겨내지 못할 만큼 곤장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헌부에서 귀가하기 전 서선에게 무슨 귀띰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도망갈 수 밖에 없다.”
당장에 필요한 것들과 가진 돈을 모두 꾸려 그대로 도망쳐버린다.
“일단은 살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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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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