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투고] 수학문제의 조건
며칠 전에 4월 학력평가가 있었다. (필자는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데) 다음날 동료 선생님 한 분이 어떤 문제를 가리키면서 도대체 뭘 물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요즘 문제의 질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말씀도 덧붙였다.
쓸데 없이 복잡한 ...
예전에 외국의 온라인 교육 서비스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필자가 한 일은 수학 문제와 그 풀이를 영어로 만들어 사이트에 올리는 일이었다. 매주 정해진 주제 분야의 문제를 만들고 나서 미국인 매니저와 화상 회의로 검토를 하곤 했다.
그 회사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지수법칙에 관한 문제를 만들면서 국내 중학교 참고서에 나오는 좀 어려운 문제 하나를 변형해서 조금 더 어렵게 만들어 보았다. 그런데 그 문제를 본 미국인 매니저의 반응은 “쓸데없이 복잡(unnecessarily complicated)”하기만 하다는 것이었다.
뜻밖의 반응에 사실 약간 당황스러웠다. 국내에서는 흔히 접하는, 그 학년에 비해 상당히 까다롭지만 누구나 당연시하는 문제였는데, 외국인의 시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수법칙에 관한 문제라면 지수법칙의 기본 원리를 알고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나름 재미도 있는 문제를 만들기를 원했다.
문제를 나누는 또 다른 기준, 좋은 문제와 나쁜 문제
우리는 보통 수학문제를 볼 때 쉬운 문제, 어려운 문제 하는 식으로 난이도를 기준으로 구별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를 보는 다른 기준도 있다. 쉽게 말해서 좋은 문제와 그렇지 않은 문제가 있다(나쁜 문제라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편의상 나쁜 문제라고 해 두자). 두 기준을 함께 적용하면 쉬우면서 좋은 문제, 쉽지만 나쁜 문제, 어렵지만 좋은 문제, 어렵고 나쁜 문제로 나눌 수 있다.
그러면 수학 공부를 할 때 어떤 문제를 가르쳐야 할까? 당연히 쉬우면서 좋은 문제를 주로 가르치고 이따금, 소수의 뛰어난 아이들에게는, 어렵지만 좋은 문제를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육환경에서 (학교 내신 문제나 시중 참고서를 가릴 것 없이) 주로 보게 되는 문제는 대부분 쉽지만 그저 그런 문제들과 어렵고 나쁜 문제들이다.
물론 쉽고 좋은 문제, 어렵지만 좋은 문제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흔치 않다. 국내 입시 환경에서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문제를 풀어보게 해야 하고 또 한편에서는 그런 문제를 끊임없이 만들다 보니 점점 쉽지만 그저 그런 문제, 기형적으로 어렵기만 한 문제가 많아지게 된다.
수능이 주도하는 고착화된 형식의 문제 경향
그리고 그런 경향을 주도하는 것이 수능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처음 의도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수능이 거의 30년 가까이 치러지면서 문제 형식이 점점 고착화하는 것 같다. 명문화된 제약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출제 내용, 스타일, 질문 방식, 단원별 난이도, 심지어 배치 순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꽉 짜여 있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파격적이라는 비난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예측가능성이라는 기준이 굴레가 되어서 문제 출제에 그 어떠한 자유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수능에서 고착된 문제 형식과 내용은 6월과 9월의 모의평가, 매월 치르는 교육청의 학력평가, 사설 기관의 모의 평가, 시중에서 판매되는 각종 모의고사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발상을 제약하여 천편일률적인 문제를 양산하게 된다. 그리고 학생들은 거의 비슷비슷한 문제의 홍수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그러한 천편일률의 원인을 수능에서만 찾는다면 지나친 생각이겠지만 수능이 교육시장과 문화를 규정하는 힘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이를테면 필자가 연전에 또 어떤 스타 강사의 모의고사 문제 출제에 참여하다가 그만두게 되었을 때, 그 분이 말한 (적어도 표면적인) 사유는 필자가 만드는 문제가 수능 스타일에서 멀어져서 점점 경시 문제에 가까워진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수능 스타일”이 갖는 규정성은 막강한 것이다.
이른 바 "킬러" 문제의 홍수를 감수해야 하는 고통은 아이들의 몫
물론 평가원에서 만든 문제 가운데에는 그리 어렵지 않으면서도 좋은 문제가 많이 있다. 하지만 그런 문제를 가끔 발견하는 즐거움의 반대편에는 수능 문제를 모방한, 정말 쓸데없이 어렵기만 한 소위 “킬러”문제의 홍수를 감당해야 하는 괴로움이 있다.
공교육이건 사교육이건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면 아이들에게 좋은 문제를 가르치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선생은 썩 좋지 않은 문제를 한없이 던져 주고 아이들은 그 문제를 하염없이 풀고 있는 고통의 바다다.
글쓴이 : 우손재 / 분당 우손재 수학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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