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혁명과 작은 왕국의 비극 - 카니 형제들의 살육 이야기
| 리비아 혁명과 작은 왕국의 비극 - 카니 형제들의 살육 이야기 |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Tripoli)로부터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에 타르후나(Tarhuna)라는 농촌마을이 있다. 지금은 평온해 보이지만, 이 마을은 지난 2011년 리비아 혁명의 발생과 더불어 바로 지난 해까지도 그치지 않는 살육의 현장이었다. 그 비극에 관한 얘기다.
얘기의 시작은 이 지역에 살던 일곱 형제다. 순서대로 압둘 칼리크(Abdul-Khaliq), 모하메드(Mohammed), 무아마르(Muammar), 압둘 라힘(Abdul-Rahim), 모흐센(Mohsen), 알리(Ali) 그리고 압둘 아드힘(Abdul-Adhim)이다. 사람들은 이들을 카니(Kani)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이들 형제의 기질은 매우 호전적이고, 거침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 중 몇몇의 결혼식과 장례식에 참여했던 함자 딜라브(Hamza Dilaab) 변호사는 이들에 대해 “무례하고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으며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았다”고 평가했다. 열등감과 자기 망상이 심했던 이들은 지난 2011년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Muammar Gaddafi)에 저항하는 혁명이 발생하자 급기야 자신들에게 내재되어 있던 잔혹함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리비아 혁명과 동시에 타르후나 장악한 일곱 형제
혁명의 발발과 더불어 이들 형제는 타르후나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시작한다. 혁명 초기 이 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카다피의 편에 서 있었다. 카다피가 이 지역 주요 패밀리의 구성원들에게 보안군 내의 일자리를 주는 등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해왔던 탓이었다.
이것이 카니 형제들로 하여금 혁명군파에 속하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됐다. 그들은 평소 지역의 주민들, 특히 자신의 몇몇 사촌들과 좋지 못한 관계를 지녀 왔는데, 이들이 대부분 카다피의 편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혁명의 이념따위는 처음부터 이들 형제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2011년 10월 20 카타피가 사망하자 이 지역에서 카니 형제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쟁취한다. 동시에 평소 자신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촌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물론 반발이 있었다. 카니 형제들의 잔혹함이 점차 심해지자 다음 해인 2012년에는 누군가가 형제들 중 여섯 번째인 알리(Ali)를 살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것이 카니 형제들의 잔혹성을 증폭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들은 알리를 살해한 자를 찾았다. 그리고 그 한사람만을 살해하지 않았다. 그의 가족 모두를 살해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공포를 지속하기 위한 이유없는 살육
더 나아가 자신들을 반대하는 자들은 무조건 죽이기 시작했다. 살육과 공포가 마을을 휘저었다. 그저 사람들을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또 다시 누군가를 살해하는 이유없는 살인이 자행됐다.
조금 나중의 일이지만, 하난 아부-클레이쉬(Hanan Abu-Kleish)라는 이 지역의 한 여성은 2017년 4월 17일 자신이 보는 앞에서 부친이 이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증언했다. 뿐만 아니라 남자 형제 세명과, 심지어는 14세, 16세의 조카 둘도 같이 살해됐다고 주장했다. 다른 친척들은 납치후 실종됐다고 언급함으로써 사망의 가능성을 암시했다. 하난 아부-클레이쉬는 이러한 살해동기가 그저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지역사회에서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들 형제는 이 지역에서 사설 군인들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수가 7천여명에 달했다. 동시에 이 지역을 미니 자치구역으로 만들어버렸다. 지역의 시멘트 공장 및 여타 업체들로부터 세금을 걷기 시작했고, 제복을 입은 경찰을 운영했다. 쇼핑몰을 구축하고 세탁소등과 같은 각종 비즈니스를 개발하기도 했다.
노골적인 불법거래도 자행됐다. 마약 거래자를 보호하면서 이권을 챙겼고, 사하라와 지중해 사이를 오가면서 이 지역을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부과했다. 카니형제 왕국이 설립된 셈이었다.
비즈니스 운영은 주로 둘째인 모하메드가 맡았다. 그나마 여섯 형제들 중 모하메드는 유일하게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았고 혁명 전에는 정규직에 종사하고 있었다. 혁명 전 그는 오일회사의 운전기사 직업을 갖고 있었고, 전통적인 수니파 옷을 입고 다녔던 것으로 알려졌다. 형제들 중 그 만이 검약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주민들은 설명하고 있다.
넷째인 압둘 라힘은 지역의 치안를 담당했는데, 동시에 복수를 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다섯째인 모흐센은 병력을 담당하면서 사설 군인들을 책임졌다. 말하자면 형제들끼리 미니 국가의 각료 역할을 한 셈인데, 이들 두 형제 압둘 라힘과 모흐센이 주민들의 살해에 가장 많이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중 압둘 라힘은 대부분의 살해에 가담했다.
2017년에는 이들이 자신들의 사설 병력을 이용해 군사 퍼레이드를 감행하기도 했다. 중장비 화기와 제복경찰, 그리고 사자 등이 동원됐다. 일각에서는 희생자들 중 몇몇이 사자의 먹이가 됐다는 얘기들이 나오기도 했다.
타르후나의 시신 발굴 현장[사진=AfricaNews.com 동영상 캡처]
이 지역에서 도주한 희생자 가족들이 이같은 사태를 트리폴리 정부에 신고한 적도 있었지만, 결과는 항상 감감 무소식이었다. 타르후나가 수도와 가까운 지역적 요충지였던 만큼 트리폴리 정부가 이들 카니 형제들을 자신들의 이용대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타르후니에서 카니 형제들은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절대적 권력자가 되어 있었다.
2019년 갑작스런 사태의 변화가 발생했다. 당시 리비아는 카다피가 몰락한 이후 다시 2차적인 내전에 휩싸여 있었다. 이슬람계로 변질된 국민협약정부(National Accord Government, GNA)가 리비아의 서쪽을 지배했고, 칼리파 하프타르(Khalifa Haftar) 장군이 이끄는 비 이슬람계의 리비아 국민군대(Libyan National Army, LNA)는 동쪽을 지배하고 있었다. 타르후나는 이들 두 세력에게 요충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GNA가 유일하게 유엔의 인정을 받고 있었지만 프랑스, 이집트, 아랍 에미리트(UAE) 등은 LNA 편에 서 있었다. 그동안 카니 형제들은 GNA의 편에 섰는데, 2019년 이들은 갑자기 입장을 바꾸어 LNA쪽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같은 해 9월 22일은 터키군이 드론을 띄워 모흐센과 막내인 압둘 아드힘을 살해한다. 이로써 카니 형제는 모두 세명이 사망하고 넷이 남게 됐다.
전쟁장비를 조달하기 위한 살육도
이들 둘이 사망했지만 GNA측은 여전히 트리폴리를 점령하지 못했다. 그러자 남은 형제들의 살육은 극에 달했다. 타르후나는 최악의 살육현장이 됐다. 주된 살해동기는 카니 형제들의 과대망상증이었지만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장비조달의 필요성도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자동차 관련사업을 해 왔던 라비아 자발라흐(Rabia Jaballah)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 형제는 자신의 사촌인 타레크(Tareq)씨를 이유없이 살해했는데, 결국은 그가 소유하던 픽업과 트럭을 강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난 해 6월 GNA측 친정부군이 타르후나를 점령했다. 남은 카니 형제들은 LNA군과 더불어 동 리비아로 도주했다. 다음날 이들이 운영하던 교도소를 방문했던 주민들은 경악했다. 감방 하나의 크기는 가로 세로 각각 70센티미터의 협소한 공간이었다. 그나마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남겨진 옷가지와 벽에 묻은 피가 전부였다. 어린 아이의 신발이 발견되기도 했다.
GNA측은 현재 현장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모두 120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몇몇 어린 병사들의 시신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민들의 시신이다. 여성들과 다섯 살짜리 아이의 시신도 나오고 있다. 시신에는 고문흔적이 뚜렷한 것들도 발견되고 있다.
등록된 실종자만 350, 실제 실종자 1천여명 주장도
GNA의 실종자 수색 확인당국(Missing Persons Search and Identification Authority)의 카말 아부바크르(Kamal Abubakr) 의장에 따르면 현재까지 등록된 실종자 수는 350여명에 달하고 있다. 하지만 몇몇 주민들은 실제 실종자 수가 1천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현재 DNA 감식을 병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발굴 과정에서 경악할 만한 증거들이 나오고 있다. 여성과 아이들의 시신이 나오는 것은 물론, 의약장비와 산소마스크, 혹은 혈관주사가 꽂혀 있는 상태로 발견된 시신도 있다. 환자를 산채로 병원에서 데려와 매장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리비아 정부는 이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GNA의 지휘계통이나 장교, 혹은 정부 당국자 중에 관련된 사람이 나올 개연성도 충분한 상태이다. 이런 가운데 국제 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도 조사에 나서고 있다. 그럼에도 남은 카니 형제들은 여전히 하프타르의 보호하에 있어 실질적인 재판은 어려운 상태이다.
한 국가의 시대적 혁명과 이 과정에서 불순물처럼 튀어나온 개인적인 복수와 살육, 이는 두고 두고 리비아에 깊은 상흔이 될 사건임에 분명하다. 전쟁중의 잔혹한 살육은 한국전쟁 동안 우리에게도 발생했던 아픈 역사가 있다. 결코 반복해서는 비극의 역사가 평행이론처럼 리비아에 또 다시 발생한 지금, 우리가 느끼는 감회가 남들보다 조금은 더 깊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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