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국민들의 잇따른 독재헌법 개헌 반대, 왜?
[ 원고 ]
군부독재에서 벗어나 민주화가 된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독재시절의 헌법을 바꾸지 못하고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칠레입니다.
지난 1973년 피노체트는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민선대통령인 아옌데를 죽음으로 몰고, 대통령 자리에 올라 1990년까지 독재정치를 이어갑니다. 그리고 독재정치를 이어가기 위해 1980년 헌법을 개정합니다.
1990년부터 칠레는 민주주의를 되찾습니다. 벌써 30년 이상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독재정부 하에서 만들어진 헌법은 개정되지 않은 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1990년 이후 칠레에서는 한동안 중도 좌파적 성향의 기독민주당과 사회당이 정권을 유지해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2010년부터는 중도 우파와 정권을 주고받습니다. 2010년부터는 중도 우파 계열의 국민개조당이, 2014년부터는 다시 사회당이, 그리고 2018년부터는 다시 국민개조당이 정권을 잡습니다. 지난 해부터는 또다시 정권이 바뀌면서 중도 좌파 계열의 사회융합당이 정권을 잡게 되는데 지금의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입니다.
중도우파 계열의 국민개조당이 정권을 잡았던 무렵, 칠레의 경제는 매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실업률이 15%를 넘어섰고, 당시 OECD 회원국 중 빈부격차가 가장 심했습니다. 사실 그 당시 남미 국가들의 사정은 대부분 다 비슷했고, 이 때문에 콜롬비아, 에콰도르 등 여러 나라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칠레에서도 2019년 10월에 대규모의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개헌여부를 놓고 다음해인 2020년 10월 25일 국민투표가 실시됩니다. 이 투표에서 78.3%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개헌을 위한 제헌의회가 구성됩니다.
지난 해에는 제헌의회가 내 놓은 새 헌법안을 놓고 국민투표를 실시합니다. 61.87%의 반대로 부결됩니다. 어렵게 내놓은 헌법안이 부결되자 이번에는 헌법위원회를 다시 구성해 새로운 헌법안을 내 놓습니다. 2023년 12월 17일 실시된 투표에서 이 역시 55.76% 반대로 부결됩니다.
지난해 취임해 벌써 두 번째 개헌안을 퇴짜당한 보리치 대통령은 이제 자신의 임기 동안 더 이상의 개헌투표는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언제까지나 다른 현안문제들을 뒤로 한 채 개헌문제에 끌려다닐 수 만은 없다는 것이죠.
다른 일도 아니고, 독재정권 시절의 헌법을 바꾸자는 국민투표에 칠레 국민들은 왜 계속해서 ‘아니오’만을 외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간단히 분석해 봤습니다.
우선 지난해 제시됐던 1차 개헌안과 올해 제시된 2차 개헌안은 그 성격이 매우 다릅니다. 지난해 개헌안은 좌파적 색채가 강했습니다. 반대로 올해 개헌안은 우파적 색채가 강했습니다. 1차 개헌안을 낸 제헌의회의 구성원중에서는 좌파인사들이 많았고, 2차 개헌안을 만든 헌법위원회의 구성원들 중에는 우파인사들이 많았습니다. 1차 부결의 여파로 좌파에서 우파로 구성원들에 대한 물갈이가 있었던 탓이었습니다.
1차 개헌안의 국민적 부결에는 진보적 색채가 선을 넘었다는 국민적 인식이 있었습니다. 2차 개헌안의 부결에는 반대로 개헌안이 지나치게 보수적이어서 오히려 지금의 헌법보다 퇴행했다는 국민적 평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차례의 개헌안 부결의 주된 초점은 정치적 시스템에 있지 않았습니다. 가령, 대통령의 임기라든지 연임가능의 여부, 혹은 국회의원의 숫자라든지 하는 그런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칠레 국민들은 그보다는 헌법이 담고 있는 사회적 이념을 더 문제시 삼았습니다.
1차 개헌안에는 소수민족에 대한 인권보장과 난민 강제추방 금지, 낙태에 관한 여성의 선택권, 성 정체성의 인정, 공기업의 남녀 동수 채용, 자연과 동물에 대한 헌법적 권리 보장 등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마 이 개헌안이 통과됐더라면, 칠레는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헌법을 가진 나라로 평가받았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국민들이 가장 문제삼았던 것은 소수민족에 대한 인권보장과 낙태에 관한 여성의 선택권이었습니다.
현재 라틴아메리카에는 마푸체족이라 불리는 소수민족이 있으며 이들은 주로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두 나라 모두에서 심한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칠레 전체 인구 중 이들 민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13% 정도입니다. 마푸치족에 대해서는 기회가 될 때 다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1차 개헌안은 소수민족의 법률적 권리를 충분히 인정하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심지어 전체 의석의 17% 가량을 이들의 몫으로 하는 지정의석제를 명시했습니다. 칠레 국민들은 크게 반발합니다. 소수 민족을 대하는 칠레 국민들의 보수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성의 낙태권리 문제는 사실 남미 대부분 국가들이 겪는 갈등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국가가 많은 관계로, 이 지역에서 여성의 낙태권리 인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최근들어 조금씩 이를 인정하는 추세이기는 합니다.
칠레는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고 있는 나라지만, 인구의 80% 가량이 가톨릭 신자이거나 그쪽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최근 남미 지역에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오순절교가 널리 퍼지고 있는데요, 칠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칠레 인구의 약 20% 정도가 이 종교를 따른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칠레의 오순절교는 정치적으로 우파를 지지합니다. 낙태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개헌을 앞두고 이 교단은 매우 적극적으로 개헌저지에 주력합니다.
원래 칠레는 저조한 투표율을 보이던 나라였습니다. 보리치 대통령은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의무투표제를 도입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1차 개헌을 막는 주요한 요인이 됐습니다. 그동안 정치적 관심이 없었던 신도들을 대상으로 교회측이 낙태반대를 독려하게 되는데요, 특히 오순절교 교단의 반대운동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2차 개헌안에서도 낙태문제는 중요한 쟁점이 됐습니다. 개헌안에는 ‘생명권’이라는 문구가 포함됐는데, 이것이 진보측 입장에서는 여성에 대한 낙태를 절대적으로 막는 하위 법률의 입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된거죠. 더 나아가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에 대한 부정적 종교관을 조장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물론 이것만이 2차 개헌안이 부결된 모든 원인은 아닙니다. 이번 개헌안은 개인자산에 대한 보장권리를 크게 중시하면서, 부유층의 재산세를 없애거나 낮출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료, 교육, 연금 등과 같은 기본적 사회 서비스를 민영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칠레 국민들이 상당히 불안을 느꼈을 법 합니다.
그런데 1차와 2차 개헌안이 모두 부결된 데에는 또 다른 공통의 요인이 있습니다. 가짜 뉴스의 해악입니다.
반미 성향이 강했던 아옌데 대통령 시절 칠레는 미국의 경제제재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이를 빌미로 쿠데타를 일으킨 피노체트 정부는 친미정권이었습니다. 이 쿠데타에는 미국의 닉슨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국민들간에 친미와 반미, 즉 진보와 보수 사이의 이념적 갈등이 매우 심합니다.
이런 나라에서는 극우와 극좌 세력의 준동이 있기 쉬운데요, 요즘은 대개 유투버들이 그 일을 많이 하고 있죠. 칠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의 개헌투표 과정에서 일반 국민들은 유투버들의 거짓뉴스에 현혹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뉴욕타임즈는 최근 글라디스 플로레스라는 한 여성의 얘기를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 여성은 이번 개헌안에 반대했습니다. 이유는 개헌안이 자신들의 권리를 모두 빼앗아갈 것이며, 자기 연금을 줄일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는 이번 개헌안이 현행의 연금제도를 그대로 지속시킬 것이기 때문에 연금이 줄어든다든지 혹은 국민들의 권리를 크게 빼앗아갈 것 같지 않은데도 말이죠.
두번의 개헌안 투표과정에서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현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칠레 젊은층의 보수화입니다.
보리치 대통령이 국민투표 의무제를 도입한 것은 투표율이 저조한 젊은층을 투표장에 데려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젊은층이 보다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판단했던거죠. 투표 결과는 그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생각보다 젊은층들이 빠르게 보수화되고 있다는 분석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각종 선거를 앞두고 보리치 대통령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이 또한 귀추가 주목됩니다.
1차든 2차든 결과적으로 진보와 보수측의 무리한 개헌안 마련이 부결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는데요, 이 때문에 개헌안을 통해 일거에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지나친 욕심이 개헌을 망쳤다는 분석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납득할만한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이죠.
이 점에서 보면 두 번의 개헌안을 모두 부결시킨 칠레 국민들을 반드시 변덕스럽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정치인들의 과욕을 적절히 제어해나가는 합리적 조정자의 역할을 했던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정치적 시스템보다는 개인의 권리를 더 중요시하는 칠레 국민들의 성향을 두 번의 부결을 통해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독재시절의 헌법을 개정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개인의 권리존중이 그보다 더 우선이라는거죠.
어쨋거나, 보리치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중에 더 이상의 개헌논의는 없을 것이라 못박은 상태입니다. 다음번 개헌 논의는 언제쯤일지, 그리고 그 내용은 어떤 것일지, 진보와 보수의 입장을 어떻게 얼마나 잘 아우르는 헌법이 될지, 많이 궁금해지는 시점입니다.
[저작권자(c) 청원닷컴, 무단전재및 재배포 금지]
[기사 제공자에게 드리는 광고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