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요제프 후버'와 독일 나치청산의 이면 (상)
명백한 나치 부역자
누가 봐도 명백한 나치당원이자 전범인, 그것도 아주 거물급 전범인 어느 한 인물이 이야기다. 그의 이름은 프란츠 요제프 후버(Franz Josef Huber).
2차대전 후 역사적 과오를 씻기 위해 노력해온 독일, 나치에 협력해온 인사들을 예외없이 색출해 관용없이 죗값을 받게 해 왔던 독일, 하지만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독일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얘기이다.
프란츠 요제프 후버는 여느 다른 나치당원들과 마찬가지로 1945년 2차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체포됐다. 다른 나치당원처럼 도주하지도 개명하지도 않은 채 순순히 체포됐다.
프란츠 요제프 후버의 모습[사진=By Source, Fair use, https://en.wikipedia.org/w/index.php?curid=38620313]
놀랍게도 그는 1948년 집행유예와 약간의 벌금형을 받고 석방됐고, 얼마 안있어 당시 서독 정보관련 국가조직의 요원으로 발탁됐다. 1964년에는 독일연방정보국(BND)로부터 3년간의 유급휴가를 받고 요원의 업무를 마쳤으나 그로부터 사망시까지 연금생활자로서의 혜택을 누리기까지 했다. 도대체 명백한 거물급 나치요원이자 유대인 학살 부역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난 4월 미국과 독일의 정보기록을 확보한 독일의 공영방송 ARD가 그 내용을 방영하고 30여분에 걸친 동영상물로 공개했다. 이로써 그동안 베일에 싸였던 후버의 재판과정에 관한 내막이 상당부분 드러났다.
1902년생인 그는 20세가 되던 1922년 바이마르 공화국 독일 경찰국에 보조원으로 입사한다. 다음 해인 23년에는 사무 보조요원으로 약간의 승진을 하게 된다. 점차 능력을 인정받아 1926에는 정치경찰국에서 일하게 되고 하인리히 뮐러(Heinrich Müller) 당시 경찰서장의 눈에 들게 된다. 나치기간 동안 둘은 매우 좋은 협력관계를 유지한다.
1937년 나치당 가입
1937년 그는 정식으로 나치당에 가입한다. 가입 후 얼마 안있어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게슈타포 본부로 발령이 난다. 당시 오스트리아 비엔타 게슈타포는 요원만도 400여명에 이르러 독일 베를린을 제외하고는 최대 규모급의 게슈타포 본부였다. 요원이 많았던 관계로 80%는 현지 오스트리아 경찰출신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약 5만여명의 민간인들을 조사, 고문했을 만큼 악명이 높았다.
후버는 이곳 유대인 추방 중앙기구(Central Agency for Jewish Emigration)의 공식적 의장이었다. 실질적 책임자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이었는데, 그는 추후 이스라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됐다. 아이히만은 이스라엘에서 사형을 받은 반면, 후버는 독일에서 석방이 된 것에 대해 추후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됐다.
1938년 그는 공식적인 비엔나 보안경찰(SiPo)및 비엔나 게슈타포 사령관이었으며 독일이 패망하기 직전인 1944년까지 조직내의 직위와 부하 인원, 권력을 모두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오스트리아에 재직하고 있는 동안 살해된 인원은 7만여명에 달했다. 이는 주로 유대인들이었고, 이들의 재산은 대부분 약탈당했다.
유대인 박해 실질적 명령 하달
이 과정에서 후버는 유대인 박해와 관련된 실질적인 명령을 내리게 된다. 즉 “바람직하지 못한 유대인, 특히 범죄적 동기가 있는 유대인들을 즉시 체포해서 다하우(Dachau) 포로수용소로 수송할 것” 이라고 기재된 문서에 서명했던 것. 며칠 후 비엔나에서는 실제로 두 차례의 유대인 수송이 이루어지고, 이것이 이후 계속되는 유대인 수송의 시발이었다.
이 문제와 관련, 훗날 그는 재판을 받으면서 자신이 유대인 추방에 개입되었던 것은 맞지만 자신은 “명령에 따랐을 뿐 어찌할 수 없었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1948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 과정에서는 자신이 1944년 말까지 유대인의 대량살해에 대해 알지 못했었다고 변명하기도 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자신의 유죄에서 벗어나기 어렵지만, 실제로는 그가 자신이 수송한 유대인의 대량살상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들도 나온 상태다. 그는 1941년 친위대및 게슈타포 사령관이던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Himmler)와 함께 오스트리아 마우트하우젠(Mauthausen) 수용소를 방문했었는데,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이 나왔던 것이다. 이곳은 최소 9만명의 인원이 사망한 곳이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유죄사실 입증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945년 체포, 구금되었던 후버는 1948년 3월에 돌연 석방된다. 집행유예와 약간의 벌금형에 처해졌을 뿐이다.
이어지는 미국측의 편들기
1947년 미국측 한 조사관은 후버에 대해 “공정하고 사실적이고 편견없는 경찰관으로서 정당적 편견이나 인종적, 정치적 선입관 없이 경찰 공무를 수행했다”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했다. 이 문서의 내용은 주로 “그가 나치 이데올로기의 추종자가 아니었고, 그는 완전히 신뢰하고 믿을만하다”는 것이었다.
이 문서가 작성된지 한달 후에는 당시 독일을 점령하고 있던 미군측 사령관이 또다시 “후버의 근면하고 협조적인 태도는 높이 평가받고 있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1948년 3월에 석방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많은 반발이 있었다. 생존자 단체와 이들 단체를 지원하는 법률가들의 처벌요구가 잇따랐고, 오스트리아 정부 역시 그의 신병을 독일정부에 계속 요구해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무시된 채 그는 완전한 자유의 몸으로 석방됐다.
독일 정보국 취업, 유급휴가, 연금, 혜택의 연속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1955년 그는 독일정보국(BND)의 전신이랄 수 있는 겔른 오거니제이션(Gehlen Organization)에 등록해 요원이 된다. 이 조직이 훗날 BND로 바뀌고 나서도 후버는 계속해서 요원으로 활동했다.
1964년 생존단체의 요구가 거세지고, 오스트리아 정부와의 부담도 더 커짐에 따라 BND는 후버를 해고하기로 결정한다. 후버에 관한 모든 사실이 밝혀졌을 때 조직이 감당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다시 문제가 생겼다. 독일 연방법에 따르면 이 해고는 부당해고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요원으로 첫 등록할 당시 후버가 자신이 나치에서 일했던 사실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뒤늦게 이를 이유로 해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BND는 후버에게 유급휴가를 결정한다. 이 유급휴가는 무려 3년이나 이어졌다. 3년 후인 65세에 후버는 정식으로 BND와의 관계를 마치게 된다.
하지만 그 후에도 그는 연금을 받았다. 그가 1975년 1월 30일 73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무려 8년간 연금혜택을 누린 것이다. 이를 지켜보는 생존자 단체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이해가 갈만한 대목이었다.
그는 왜 이같은 혜택을 누렸을까? 최근 독일 공영방송 ARD는 이와 관련된 정보문서를 입수해 그 내용을 방영했다. 이로써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추정으로만 진단해왔던 그 이유가 한층 명확하게 밝혀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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